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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Mar 07. 2023

아마도 그건 소시지일 거야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_ 김보통

나는 달리기를 못했다. 그냥 못했다는 말로는 부족한데, 내가 어휘력이 부족해서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체육 시간이든 운동회든 달리기 꼴등은 늘 나였다. 운동회를 하면 6명씩 뛰어서 손바닥에 도장을 찍어 주고 1등은 노트 6권, 2등은 5권... 그리고 꼴등은 1권 줬는데 나는 항상 노트를 1권만 받아서 허이허이 오는 게 일이었다.


그깟 노트야 돈 주고 사면 되지. 정작 괴로운 건 "이 새끼 또 꼴등 했다! 으하하~" 이거였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그것도 당연해졌다. '잘해봐야지' 이런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그냥 '난 달리기는 못하는 놈이다' 이거였고, 전생에도 태초에도 난 그냥 꼴등이었던 거다.


그러다 어느 날. 어린이 만화잡지를 봤다. 여러 만화가 들어 있는 월간 잡지에 4컷짜리 광고 만화가 있었다. 어린이 영양간식 소시지. 이 4컷 만화는 달리기를 지지리도 못하는 놈이 그 소시지를 먹고 기적처럼 괴력을 발휘해서 1등을 하는 내용이었다. 결말만 빼면 내 상황과 똑같았다. 만화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꾸짖었다.

하지만 돈이라곤 한 푼도 없었다. 호주머니를 까뒤집으면 먼지만 폴폴 날리는 신세. 한 푼만 생겨도 그 길로 빛의 속도로 오락실 뛰어가서 메롱 까먹고 오니 내겐 용돈이라곤 동전 한 푼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믿기 힘들겠지만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내 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럴 수밖에). 심지어 집에 있는 부모님 버스 토큰을 박박 다 털어 애벼가서 버스정류장 신문 파는 곳에서 몽땅 동전으로 바꾸고 오락실에서 다 까먹고는 "여기 있던 토큰 다 어디 갔어?" 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면 소파에 비참한 포즈로 널브러져 죽은 척을 하기도 했다.


이러니 소시지를 무슨 돈으로 살까. 누나 저금통을 털기로 했다. 한밤중에 일어나서 누나 방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서 고양이 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가서 피아노 위에 있는 누나 돼지저금통을 더듬더듬 찾고 구멍을 젓가락으로 살살 쑤셔서 조용히 동전을 샥샥샥 빼냈다. 이 거사를 위해 어둠 속에서도 돼지저금통을 찾을 수 있도록 전날 저금통을 피아노 위에서 가장 구석자리로 살짝 위치를 바꿔 놓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소시지를 샀다. 수수깡 상자같이 생긴 갑에 소시지가 4개 있었다. 꼴딱+꼴딱+꼴딱+꼴딱. 4개를 흡입했다. 그리고는 전체가 다 나가서 조별로 해야 되는 체육시간 달리기에 나갔다. 시작도 안 했는데 기분 좋게 떨렸다. 난 보나 마나 1등일 거니깐.

맛있겠죠? 실제로 이렇게 생기진 않았었지만...

화약총 소리와 함께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신발 밑창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나도록 뛰었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아무도 믿지 못했다. 달리기 꼴등은 도맡아 하던 놈이 이건 무슨 약이라도 빨았는지 꼬랑지에 모터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총알같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뛰면서 인기척이 안 느껴지고 어째 진공 속에 둥둥 떠있는 느낌이 나서 뒤를 보니 다들 저 멀리서 까만 점이 되어 쫓아오고 있다. 에잉, 저것들은 뛰는 거냐, 걷는 거냐, 기는 거냐? 발바닥에 파리 앉겠다.


가슴을 감싸 주는 결승선 테이프의 느낌이 말도 안 되게 포근했다. 마치 구름 위에 엎어진 것 같았다. 심장은 두근거리다 못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샤워기로 심장에 뜨거운 물을 촥 끼얹는 느낌이었다. 한참 후에 2등으로 삘삘 들어오는 애를 붙잡았다. 그놈의 볼을 빽 비틀어 꼬집었다. 아얏! 왜 꼬집냐고 화를 낸다. 왜긴 왜야 요놈아, 내 볼을 꼬집으면 아프니까 그렇지. 어쨌든 꿈은 아니군. 꿈이었다면 걔가 깨어서 어디론가 사라졌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뛰는 걸로는 누구한테 져 본 기억이 없다. 놀면서 대충 뛰어도 1등이었고, 운동회의 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여심스틸러라는 계주 마지막 주자도 늘 나였고,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군대 때도 이 소시지의 약발은 계속 이어졌다. 닭을 보면 쫓아다녔다. 내가 이걸 잡을 수 있나 없나 궁금했다.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때 소시지가 얼마였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요즘 돈으로 몇 백만 원을 줘도 아깝지 않다. 이젠 그 회사가 없는데 만약 지금도 있었다면 바로 내가 그 만화광고 효과의 산 증인이니까 실제 모델로 세웠으면 대박 났을 텐데. 그럼 나는 모델료 받고 오락을 수천 판은 했을 텐데.




글쓰기에서 남들한테 좋은 평가를 받아 본 적이 없다. 브런치에서 보통 한두 번은 받는다는 제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글쓰기를 취미로 갖고 있다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책도 내 보고 싶다고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말하면 돌아오는 말은 가장 많았던 게 아무나 책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이었고, 그다음으로 많았던 게 꿈 깨라는 말이었다.


저는 작가를 꿈꾸지 않아요.

작가라는 건 꿈으로 꾸는 게 아니니까요.

시인도, 에세이스트도 그렇듯

작가는 직업이 아니라 상태입니다.

작가라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니까 작가일 뿐입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지만 돌아오는 말이 "뭐래니..." "야, 내가 널 알아, 너는 글쓰기는 아냐" "그래서 책은 내 봤어?" 이런 기억들만 하나 가득이니 이젠 어디 가서 글쓰기가 취미라고 말도 못 하고 있다. 심지어 오래전에 예전 직장에서 참여했던 글쓰기 모임에서 첫날 "엔지니어가 왜 글을 쓰세요?" 이 말을 들은 뒤부턴 어디 가서 글쓰기 좋아한다는 말은 아예 포기해 버렸다. 딱 하나, 브런치 빼고.


남들에게 인정받기, 나 자신에게 인정받기. 둘 다 내가 못하는 거지만 딱 하나만 할 수 있다면 내 선택은 후자다. 그런데 전자가 된다면 후자도 자연스럽게 되겠지만 누구에게도 인정받은 적이 없는데 내가 나를 인정해 버리자니 어쩐지 나 혼자 정신승리하는 것 같아서 이게 영 뻘쭘하고 쉽지 않았다.


요즘 읽는 책은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김보통)>이다. 이 책을 권해 주신 브런치 작가님은 이 책의 저자(김보통)와 내가 어딘가 닮았다고 하셨는데, 그걸 나 스스로 찾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책을 읽어 보니 김보통 저자는 인기작가답게 소재도 풍부하고 유머나 기술적인 부분도 나 따위가 견줄 것은 아니었다. 나와 닮았다기엔 지나치게 훌륭한데. 어디가 닮았냐고 추천해 준 작가님께 물으니 작은 것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하는 힘이라고 하셨다. 단지 '이 책이 재밌으니 읽어 봐라' 이게 아니라 그건 그분의 시선으로 보는 나의 글쓰기를 말씀하신 거였기 때문에 내겐 그냥 책 추천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시지였다.


이제까지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는 그 작가님에 대한 팬심 때문에 그 말을 더 무겁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만약 누가 나한테 이제까지 보아 온 사람들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 한 명만 말해 보라고 한다면 어쩌면 나는 조심스럽게 그분의 이름을 말할지도 모르는데, 하필이면 그분이 하신 말씀이었으니.


고마워요. 제겐 소중한 말이에요.

좋은 책보다 그 한마디가 더.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산다.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착각,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 나는 누군가를 잘 안다는 착각, 나는 욕심이 없다는 착각, 나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착각,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 나야말로 가장 상식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착각, 나는 착각 따위는 안 하고 산다는 착각... 어쩌면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착각 속에서 살다가 아주 가끔만 제정신인지도 모른다.


그분이 이 책을 추천해 주시고 나에게 하신 말씀을 내가 금과옥조처럼 부둥켜안는 것도 어쩌면 나의 목마름이 낳은 또다른 착각일지 모른다. 단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서일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일관되게 들어 온 말처럼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는 실제로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보다 나쁜 건 나는 못한다는 생각 아닐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게 착각이라도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까진 아니겠지만 나는 못한다는 생각은 영원한 마이너스일 테니. 어차피 사람은 살면서 착각을 피할 수 없다면 이왕이면 좀 행복한 착각에 빠지는 게 꼭 나쁘기만 한 걸까. 그리고 설령 착각인들 좀 어떤가. 어차피 삶 자체가 통째로 하나의 거대한 꿈이고 착각인데, 착각도 마이너스될 일이 없는 행복한 착각이라면 어디 한 번 미친 척하고 빠져 볼 만도 한 것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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