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짝임을 더 빛나게 해 준 사람
J군이 유학을 간다는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한국에서 캐나다로 유학을 와서 만난 건데, 캐나다에서 또 타국으로 유학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설마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유학을 캐나다로 온 건데 또 유학을 가는 게 말이 되나? 그 당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그곳이, 내가 마주하고 있던 현재가,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 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할 정도로 생각이 좁았기 때문에 유학 중 또 다른 곳으로 유학을 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J군도 별 말이 없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매일을 함께 보냈기에 그저 J군의 유학 관련 이야기는 그저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그런 소문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서 깊게 파내려 하지 않았다. 그 소문이 사실일까 봐 무서웠다. 어떻게 찾아낸 나의 기적인데, 얼마나 좋아하는 J 군인데. 함께 하게 될 내 하이스쿨 생활을, 서로를 축하해 줄 멋진 졸업식을.... 프롬 드레스를 입게 될 그날을 얼마나 크게 계획해 왔는데. 소문의 내용만으로도 하늘이 그냥 내려앉아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소문이 무성한 한 달이 너무나도 빨리 훌쩍 지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점점 커지고 디테일해져서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J군 미국으로 유학 간다며?”
“야 걔 거기 오렌지 카운티로 간다던데? 대학을 거기로 가나?”
“내가 듣기로는 걔네 이모가 미국에 사신다던데. 거기인가?”
“1년 꿇고 간다는 거 같은데”
“너 괜찮아? 이야기해 봤어?”
결국 너무 자세한 내용의 소문이 많이 도니까 메신저로 몇 번이고 간접적으로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지만 늘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다고만 말하는 J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느 날 너무 불안한 마음에 혹시 몰라 J군과 가장 친한 친구를 붙잡고 소문에 대해 물었지만, J군의 친한 친구까지도 난처한 얼굴로 “이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아. 미안”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 오빠의 표정과 눈빛을 보고 나는 그 소문이 사실이구나라고 확신이 들었다.
매일 학교를 마치면 채플 강당에서 J군을 만나 함께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소문이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마음에 콕 박이고 나서는 J군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어서 바로 주차장으로 냅다 뛰어가서 아빠 차에 올라타고 바로 집으로 갔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메신저를 켜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J군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전화통화를 했을 터인데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뒤죽박죽 엉켰다. 나는 극 ENFP라 잦은 망상에 빠져들곤 하는데. 이날 밤, 별의별 망상에 젖어 J군이 미국 유학을 나서고 나는 폐인이 되어 점점 말라죽어가는 상상까지 했다. 그런 쓸데없는 망상에 젖은 상태로 침대에 누워 뒤척이다가 일찍 잠이 들었고, 다시 잠에서 깨었을 때는 12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놀라서 메신저를 급하게 들어갔는데 J군의 메시지가 바로 떴다.
“왜 먼저 갔어? 나 채플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고 싶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에 줄줄이 달려있었는데.
J군이 먼저 이야기해줬으면 해서. 그 이야기가 무엇이던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피곤해서 먼저 잔다는 이야기만 해놓고 그대로 다시 저 멀리 던져놨던 망상을 끄집어와 있는 대로 크게 부풀려서 그 만들어낸 스토리에 걱정이 되어 울면서 잠이 들었다.
진짜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내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것처럼. 그때의 나의 하루하루는 J군으로 가득 차서, 뭐든 J군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같이 듣는 수업이 오전에 없어서, 오전 수업 내내 J군이 떠나면 나는 어떡하지?라는 하찮은 생각을 하며 멍하게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어서 카페테리아에서 J군을 다시 봤는데
평소 같았으면 옆에 나란히 앉아 나름 꽁냥꽁냥스럽게 점심시간을 행복하게 보냈을 텐데, 눈을 마주치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괜히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해 버렸다. 친구들도 내 상황을 아니까 최대한 대화의 흐름이 깨지지 않게 뭐라도 내뱉으면서 대화가 끊기지 않게 내가 뭐라도 뱉어내며 J군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도와줬다. 그리고 눈치 빠른 친구들이 J군에게 따로 눈치를 줬고 J군은 내 이상하고 어색한 행동들의 이유를 알아채고 점심이 끝날 때쯤 수업이 끝나고 강당에서 만나자고 당부를 하고 교실로 향했다. 오후 수업이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중간에 같이 듣는 수업이 있었지만 또 있는 둥 없는 둥 무시를 했고 내 머릿속은 이미 수업 끝나고 가야 할 강당 생각, J군 입 밖으로 나오게 될 말들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락커에서 바인더와 텍스트북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당으로 향했다. J군이 가버리면, 앞으로 이 길에서 같이 걷는 일도 없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 거짓말 안 하고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몇 번이고 훔치며 서 있었다. 뒤에서 걸어오는 대만 친구들이 날 보고는 “왜 저래?” “왜 울어..?” 하면서 수군대며 나를 앞질러 갔지만, 나와 체육 빼고 모든 수업을 같이 듣던 친구가 돌아보며 “괜찮아?” 하더니 눈치껏 앞서 걸어가 줬다. 원래 우는 사람한테 괜찮냐고 다독여주면 더 눈물이 나는 법.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고맙다고 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떨궈내렸다.
그렇게 세상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당 문 앞에 서서 교복 소매로 눈물을 닦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 커다란 문을 당겨서 들어갔다.
놓인 수많은 의자들, 그리고 거기에 J군이 혼자 앉아있었다. 사실 J군이 나보다 늦게 오고, 그 자리에 먼저 와 있지 않았다면 나는 하루라도 슬픔이 다가오는 시간을 벌어보고자 그대로 집으로 갔을 거다. 그냥 쓱 훑어보고 도망쳤을 텐데, J군은 벌써 자리 잡고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J군 옆자리에 가서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J군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입을 뗐다.
“ 화.... 났어?”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머리를 정말 굽혀서, 바닥만 보고 있는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세상 슬픈 얼굴을 하더니
“울지 마... 나 미국 가는 거 확실하지 않아. 너 지금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잖아...”라고 했다.
정말 미국 유학이 맞았구나. 쿵 하고 심장이 외줄 타기 줄 정 가운데에서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확실하지 않다는 건, 어쩌면 가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흐르는 눈물은 이쯤 돼서는 주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이아가라 뺨치게 흘러내렸다.
며칠을 온갖 망상에 젖어 미리 상상 이별을 하면서 더는 뽑아낼 눈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눈물샘은 마르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눈물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울지 말라고, 교복 소매를 쭉 잡아 뽑아서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주며 나를 달랬는데.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건지 J군의 한마디에 나는, 엄마 찾는 5살짜리 꼬마처럼 목놓아 울었다.
“ 혹시, 정말... 혹시 내가 미국 가더라도, 절대로 안 헤어져.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마”
그렇게 순식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얼마 전까지는 남부러울 게 없는, 세상 모든 게 아름다운 매일을 살고 있었는데 하루 만에 암흑기에 갇혀버렸다.
만약이라는 말, 혹시라는 말은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저 곧 J군이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매일 자기 전에 J군과 메신저로 이야기를 하다가, 잠자기 바로 전엔 늘 혼자 눈물을 삼키거나 아니면 아예 펑펑 울어버렸다.
J군이 어쩌면 미국으로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이후로 사실 변한 건 딱히 없었다. 그저 불안함이 생겼을 뿐 매일이 똑같았다. 늘 하던 달달한 장난도, 세상 활짝 웃어주던 미소도... 다정하게 불러주던 목소리도 다 똑같았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J군은 떠나게 될 거란 걸.
매일 밤 언니한테 가서 신세한탄을 하고 자기도 L군이 (언니 썸남) 그런 상황이 된다면 속상할 거 같다고, 이해한다고 최선을 다해 나를 달래 줬다.
그렇게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J군의 전화가 오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곤 했는데, 어느 날 J군이 저녁 늦게 전화를 했다.
“뭐 하고 있었어?” 다정한 J군 목소리. 지금도 생각하면 바로 옆에서 들릴 것처럼 너무 생생한 목소리. 허스키하다고 해야 하나, 걸걸한 편인데 이름을 불러줄 때나 대화를 하다 보면 목소리에 다정함이 녹아있다.
“아 나 밥 먹고 올라왔어. 육개장 먹었다?”
“또 엄청 먹었지???”
“아냐 오늘은 소식했어!!!”
“설마 또 두 그릇 이상 먹고 소식한 거라고...”
“응 세 그릇 먹었다”
“그럴 줄 알았어. 잘했어!”
정말 생생했던 그날의 대화. 평소와 너무 달랐던 J 군이었다. 평소처럼 장난치며 툭툭 던지는 대화였는데 목소리가 슬프게 들렸다고 해야 하나.
J군의 머뭇거림과 말없이 그냥 핸드폰을 잡고 있는 시간이 평소보다 많고 길었다.
그러더니 J군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나 사실 오늘 부모님 하고 통화를 했거든.....”
“.... 응..”
“그런데... 나 미국 가는 거 말이야.... 아무래도 확정된 것 같아. 이모 댁으로 가게 될 것 같아”
숨소리만 듣고, 나도 숨소리만 내고
서로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근데 다음 학기 끝나고 학년 맞춰서 내년에 여름방학 끝나고 갈 거 같아”라고.
그때 미친 듯이 머릿속에서 달력을 펴서 계산했다. 다음 학기 끝나고 가는 거면, 반년 조금 넘게 남은 거였다.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순 없어서, 꾸역꾸역 뭐라도 생각해서 내뱉었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래. 잘 됐네. 대학도 거기서 가겠네?”
“응...”
그냥 담담해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입술을 하도 잘근거려서 아랫입술이 너덜너덜해지고 입에서 피맛이 계속 나도 멈출 수가 없을 정도로.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전화기만 들고 한 단어 한 단어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몇 날 며칠을 망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별연습을 했기 때문에 이런 순간이 와도 나는 괜찮을 거라고, 멀쩡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망상이랑 현실이랑은 너무나도 달랐다.
“ 불안해하지 마. 내가 너 지금 이렇게 많이 좋아하고, 앞으로 6개월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그럴 거야. 나는 네가 내가 미국 간다고 해서 힘들어하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계속 연락할 거야, 지금처럼”
“응 알겠어”
나는 남들이 말하는 연애 고자였지만, 장거리 연애가 얼마나 힘든 건지, 어떤 기적을 일궈내야 합이 맞아 연애가 지속되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도 결국 우리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대답은 힘겹게 했지만 J군이 떠날 때까지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떠나간다고, 헤어질 위기라 해도 매일 더 좋아지는 J 군인데 나 어떡하지. 하면서 그날도 뒤척이며 잠을 잘 못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