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같은 시간이라고 그랬다. 정말 그때만큼 시간의 흐름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콱 박혔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J군의 미국 유학이 확정된 순간부터 1분 1초가 그렇게 아깝고, 흐르는 시간이 무섭고 두려웠다. 붙잡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라도 매달려서 다시 돌려놓고 싶을 만큼.
다음날 학교를 갔는데 기억이 또렷이 나는 건, 학교 정문 입구에서 J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환한 미소를 띠고. 다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듯한 그 미소에 안심이 되었다.
그때의 매일매일이 지금 나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고, 힘들 때 조금씩 꺼내어 보는 일기 마냥 내게 그런 존재가 될 걸 알았다면 더 많은 것을 함께 했을 텐데. 우리 둘 다 입시를 앞둔 학생이었고, 더군다나 돈을 더 들여 공부를 해야만 했던 환경에 있었던 유학생이었기에 둘이 따로 여행을 간다던지, 따로 자주 만나 데이트를 한다던지 그런 걸 못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청춘을 불사르며 J군과 할 수 있는 즐거운 일들은 다 해볼걸, 늘 하는 후회를 나는 오늘 또 한다.
그때 내가 다녔던 학교는 크리스천 학교였는데 사립이어서 학비 외에도 추가 액티비티 활동비를 따로 내서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활동을 통해 정말 많은 추억거리를 쌓게 해 준 듯하다. 스키장도, 래프팅도, 일 년이면 몇 번씩 가던 필드트립들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추억의 전부가 되었다.
J군과 함께 학교를 다니는 매일이 소중했지만, 또 사람의 심리가 참 이상한 것이 그때 나 스스로도 J군이 떠나고 내가 받을 상처가 너무 클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인지 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내 마음을 모두 쏟아내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진짜 그야말로 고구마 먹다가 명치에 걸린듯한 기분으로 몇 개월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J군이 웃는 걸 봐도 그 웃는 게 너무 좋아서 따라 웃기보다는, 그 웃는 게 아프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은 최대한 함께 보냈지만, 전처럼 해맑은 미소에 미소로 대답하는 게 힘들어졌다. 매일 그렇게 평범하게, 무난하게 시간이 흐르는 대로 매일을 흘려보냈다. 시간은 흐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지 말라고, 함께 졸업도 하고 대학도 가고 하자고 하기에는 내가 J군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었으니까.
눈만 감았다 뜬것 같았는데 3개월이 지나고 방학을 했다. J군은 미국 갈 준비를 하고 가족들을 보러 한국에 갔었다. 시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메신저나 전화를 하면서 앞으로도 이럴 거라고 믿으라고 했다.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 뒤에는 항상 헤어지게 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자리 잡았다.
그때 당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온 사람들은 남자 친구, 여자 친구가 한국에 있어서 롱디를 하고 있는 사람이 꽤 되었는데. 열이면 열, 반년이 되기도 전에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J군은 끝까지
"미국 가서도 이렇게 지내면 돼! 전화하고 메신저도 하고. 매일 이렇게!" 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학창 시절 가장 설레는 때를 꼽자면 길고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이다. 지금은 캐나다 호주 미국 등에도 작은 한국이 옮겨져있다 싶을 정도로 한국 물건들 사기가 쉽고 싸기도 하다. 실력이 좋은 고급 미용실이며 심지어 한국 옷가게들까지 즐비하게 있지만 내가 캐나다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미용실이 있더라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고 또 한국에서 방영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녹화해서 한인마트에서 대여를 했을 정도였을 정도로 구식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래서 방학이면 한국에서 미용실도 다녀오고 예쁜 옷들도 한가득 사 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학교는 교복을 입던 학교여서 새 옷보다는 머리가 달라졌다던지 살이 찌거나 빠졌다던지 피부가 좋아졌다던지로 한국을 다녀왔는지 다녀오지 않았는지 가늠이 가능했다. 대만 친구들과 싱가포르 친구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 친구들도 집에 다녀오면 때깔이 좋아지고 머리 스타일도 변해져 있어서 그런 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개학 첫날은 그동안 무슨 일들을 하고 지냈는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시간이 많았다. 방학 동안 유학을 그만두고 아예 돌아오지 않는 친구들도 여럿 되었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은 그 나라들에서 사 온 기념품이나 쿠키 같은걸 선생님과 친구들과 나눠먹기도 했다. 수많은 방학을 보냈었지만 그 해의 개학날은 조금 특별했다. J군과 마지막으로 보내는 가을학기 개학날이기 때문이었다.
개학하는 첫날,
아빠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기도 전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J군을 찾았다. 방학 내내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군데군데 뭉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J군이 보였다. 살짝 어색하려나 싶어 내려서 친구들부터 찾아 인사부 터하고 함께 J군에게 다가갔다. 키가 좀 큰 거 같았고, 머리를 짧게 잘랐고.... 되게 어른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남학생들은 대부분 키가 훌쩍 커져있기도 했는데, J군도 불과 몇 달 만에 많이 변한 것 같아 왠지 어색했다. 오랜만에 봐서 어색했던 건지, 변한 J군의 모습에 어색했던 건지 뻘쭘하게 옆에 서서 잘 지냈냐고 물으니, 내가 어색해하는걸 눈치채고 내 양볼을 잡고 비틀어댔다.
"또 엄청 먹었구나?" 라며.
방학 내내 정말 열심히 먹은 탓에 교복 치마가 안 잠길 정도로 쪘긴 했었다. 변명은 아니지만 나는 스트레스받으면 먹는 스타일이라, 방학 내내 J군 탓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1일 1 닭은 물론이거니와 엄마가 육개장만 끓이면 세 그릇이 기본이었다.
"엉 나 스트레스받아서 엄청 먹었어. 치마도 안 잠겨서 옷핀으로 꼽고 왔어, 봐."
카디건을 슬쩍 들어 올려 불어 터진 뱃살 사이로 치마를 힘들게 붙들고 있는 옷핀을 보여줬다.
J군은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카디건을 다시 쭉 내리더니 물었다.
"왜 스트레스받았어"
"몰라"
"말해줘 왜"
"몰라. 우리 지금 강당 가야 돼. 어셈블리 있어!"
나란히 강당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J군 향수 냄새에 괜히 울컥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더 넓어지고 머리도 짧아지고 정말 많이 달라졌는데 향수는 여전하네... 하면서.
학기가 시작되고 다시 모든 게 제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J군이 미국으로 바로 가버리면 어쩌나 방학 내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돌아와서 참 다행이었다. 주말에 친구들과 노래방을 갈 때면 항상 버블티 집에서 만나서 함께 놀기도 했었는데 그 버블티 집은 우리 학교 대만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이 늘 진을 치고 있었다. J군은 타로 맛을 제일 좋아했는데 그 이유가 웨하스 맛이 난다는 거다. 처음 J군 때문에 타로 맛을 먹어보고 이게 뭔가 싶어 뱉었던 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익숙해지면서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늘 타로 맛만 먹는다.
내가 시킨 멜론맛 버블티를 보고 한입 먹더니 타로가 최고라고 엄지 척하던 모습이 정말 신기하게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요즘 들어 그 말 안에 내재된 진짜 뜻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주는 영향이, 그것이 작은 것일지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J군으로 인해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사소한 것부터 내 인생의 큰 틀까지 흔들렸고 그 덕에 시간의 소중함을 알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고, 타로 버블티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좋은 이별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좋은 이별이란 무엇일까.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때 나는 그런 것 따윈 없다고 생각했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 한, 사랑하니까 놔준다는 말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는데. 정말 사랑하면 보내주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걸 J군을 통해 알았다.
나는 그때 나름 성숙하게 사랑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