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짝임을 더 빛나게 해 준 사람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다는 것만큼 설레고 소중한 감정도 없는 것 같다. J군을 좋아하게 되고 사귀게 되면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중 처음 느끼는 감정들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깨달았다. 사실 지금 곁에 누군가가 있는 사람들은 대단한 확률을 뚫은 행운아들이다. 태어난 것 자체부터가 그렇지만, 그것 외에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얻었다면 엄청난 확률을 뚫고 만난 것이니까.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 내 옆의 누군가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건 확률로 따지자면 기적이나 다름이 없다. 태어난 자체도 기적인데,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마침 그때 그 시간에 그날에 만나게 되고 또 서로에게 마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많은 확률을 뚫어야 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와 소리가 절로 나오기도 한다. 나와 J군은 심지어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만나 마음이 맞았으니 ‘확률의 기적’ 같은 걸 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J군과의 연애를 시작했을 때 그때의 벅참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꿈만 같았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 순간이 행복 그 자체였다. 그때 생각하면 기억나는 것이
나는 설거지하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어느 날 엄마가 지인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메뉴는 바비큐였다. 고기를 굽는 날은 유난히 설거지 거리가 기름지기 때문에 닦는 게 두배로 어렵고 귀찮았다. 남자 친구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그날도 역시 온몸에서 행복바이러스가 뿜어져 나오고 긍정 에너지가 온몸에 흘러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설거지하면서 밖에 보이는 노을도 너무 멋있고, 옆에서 싹싹 기름때 없이 잘 닦으라는 엄마의 잔소리도 고맙고, 설거지하다가 발견한 창문 밖의 이상하게 생긴 벌레마저 아주 멋진 생명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다 못해 먹다 남은 뼈다귀에게도 내 뱃살과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되기 위해 희생해 줘서 감사하다고 마음의 인사를 전할 정도였다. 이쯤 되면 정신병이었던듯하다. 사랑은 유치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유치했다. 하지만 유치했기에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를 생각하며 웃을 수 있는 것 같다.
그쯤에 내 행동이 너무 이상하니 부모님이 영 이상하다며 언니에게 물어보셨고, 나와 J군이 사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 J군한테 고맙다고 해라. 이왕이면 끝까지 책임져달라고.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줘라. 나는 진짜 걱정했잖아 너 같은 이상한 애를 누가 데려갈까.”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서 주워온 아이가 틀림없다고. 유별난 내 성격을 누가 받아줄까, 엄마는 나를 낳자마자 걱정이 되셨다고 했다. 실제로 나는 혼자 걷기 시작할 때쯤 옆집에 가서 그 집 아기 보행기를 타고 다니고 반나절 넘게 있다가 실종 신고가 된 적도 있고, 유치원 때 힘으로 주방 문짝을 다 떼놓기도 하고 의사 놀이한다고 의사놀이 세트 장난감에 있는 솜을 언니 콧속 깊이 넣고 빼는 걸 깜빡해서 병원신세를 지게 한 적도 있는 특이한 아이이긴 했다. 그 당시에는 딸이 남자 친구 생겼는데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니. 정말 우리 엄마가 맞나 싶었다. 하지만 머리 크고 나니 뭐, 나도 나 같은 딸 낳고 싶지 않다.
J군과 사귀는 건 별다를 게 없었다. 그저 전화통화를 자주 했고, 메신저를 자주 했고. 수업할 때는 옆에 앉았고, 점심을 같이 먹었고. 정말 건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건전한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건전했다. 그렇다고 건전하지 않게 사귈걸이라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때 그렇게 사귀었기에 지금처럼 추억될 수 있는 거니까.
통화를 정말 매일같이 했었는데 그중에 하나 기억나는 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딱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는데 어느 날 통화를 하다가 J군의 꿈에 대해 듣게 됐다. 그 당시 J군은 파일럿이 꿈이었다. 될 수만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파일럿이 되면, 나 비행기도 태워주겠다고. 제일 먼저 태워주겠다고 약속도 했었다. 나는 공부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성적도 별로라 걱정을 하니까 “넌 그림을 잘 그리잖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내가 일기를 썼더라면, 싸이월드가 존재했을 때 더 열심히 했더라면, 지금처럼 핸드폰이 발전되었더라면 하나하나 추억거리가 될 이야기들을, 많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을 텐데 너무 아쉽다. 이제는 그때 어떤 통화를 했는지 큼지막한 것들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수업을 같이 들을 때면, J군은 내 옆자리나 앞자리에 주로 앉았는데. 앞자리에 앉을 때면 머리를 고개로 쭉 하고 젖힐 때가 있었다. 그러면 내가 머리를 슥슥 만져줬었는데. 머리에서 진짜 좋은 향기가 나서
“머리에서 진짜 좋은 향기 나!”라고 그랬더니
“알아, 일주일 안 감았는데 이 정도야”라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와중에 뭐라도 공유하고 싶어서 쓰는 샴푸가 뭔지 물어봤는데 팬틴에서 나오는 초록색 샴푸라고.
누군가에게는 흔하디 흔한 향기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나한테는 최고의 샴푸 향이었다.
어느 연예인은 여행지를 가면 늘 향수를 하나씩 사서, 시간이 지나고 그때 그 여행을 추억하고 싶을 때 그곳에서 샀던 향수를 뿌린다고 한다. 나는 그것에 아주 격하게 공감을 하는 게, 15년이 지나도 J군이 쓰던 샴푸를 우연히 쓰게 되면 다시 그때 그 교실로, J군이 내 앞자리에 앉아 고개를 젖혀 머리를 만져달라던 그때로 돌아간다. 그만큼 향기에 담긴 힘이 크다. 마치 타임머신처럼 추억을 그리고 또렷한 그 기억을 현재로 끌어당겨 주는 것만 같다.
J군이랑 사귀면서 가장 좋았을 때는 함께 여행을 갔었을 때였는데. 학교에서 시즌마다 여행을 갔었어서 정말 매일 손꼽아 기다렸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수학여행 같은 거였는데, 캐나다에서 스키장으로 유명한 휘슬러 여행을 매 겨울마다 갔었다. 당일치기로 가는 거라 새벽 4시쯤 학교 주차장에서 모여서 가는 거였는데 늘 그렇듯 여행 전날엔 깊게 잠을 못 잤다. 남자 친구가 생긴 뒤로 처음 가는 여행이니까 설렘이 두 배였기 때문이다. 역시 성격 급한 아빠 탓에 언니와 내가 주차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고. 정말 불빛 하나 없는 주차장에 아빠 차만 덩그러니 주차되어 있었다. 15분 정도 지나니 다른 차들이 주차장에 주차를 하기 시작했고 아빠에게 차 시동 끄고 기다리자고 하고 숨죽여 다른 친구들이 오는 걸 지켜보면서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 기다리는데 J군이 어슬렁어슬렁 우리 차 쪽으로 오더니 양손을 모아서 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닌가. 그사이 아빠가 시동을 탁 하고 거니까 “억!!” 하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차는 우리 차가 맞는데 어둠 속에서 시동도 안 켜고 있으니 이상하다 싶었는지 안을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아빠가 창문을 내리자 또 당황하면서 두 손 모아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아빠와 인사하고 나와 언니도 차에서 내려 다른 친구들과 노란 스쿨버스에 탑승하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J군과 나란히 아주 자연스럽게 커플석에 앉았고 같이 노래도 듣고 기대서 자기도 하고 마빡 때리기 놀이도 하고 앞자리 친구들이랑 손바닥 때리기 놀이도 하면서 즐겁게 여행을 시작했다. 얼굴 빼고 온몸이 건조한 나는 로션을 챙겨갔는데. 이게 겨울이라 그런가 반쯤 굳어서 안 나와서 손에 탁탁 몇 번 쳐서 짰더니 이번엔 너무 많이 나왔다. 거의 전신을 발라도 될 만큼 나와버려서 닦을걸 찾는데 J군이 손바닥에 소복이 쌓인 로션을 보더니 자기 손을 내 손에 포개서 마구 문질렀다. 좋으면서 하지 말라고 성질을 내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이만큼 남잖아. 봐봐 엄청 많아! 얼굴에도 발라줄까?”
“아니”
J군 덕에 마치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 있었고 그위로 J군이 여탕 때밀이 아주머니처럼 손을 챱챱거리며 로션을 흡수시키려 애를 썼으나 두 명이 바르기에도 많은 양이라 앞자리 친구들에게 까지 나눠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지만, J군과 동갑친구인 오빠가 내 손등의 로션을 긁어가자 J군이 세균 옮았다고 축축하게 로션으로 코팅된 자기 손을 다시 내손에 문질러댔다. 명치가 또 설렘에 찌르찌르 찌르르르거리고 J군의 귀여움에 미치는 줄만 알았다.
스키장에서는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J군이 매일 더 좋아지는 하루하루는 지속되었다. 버스에서 돌아오는 내내 J군하고 손잡고 왔는데. 첫 스키여행이라 여분의 옷을 챙기지 않아서 눈에서 뒹굴면서 옷들이 다 젖었었다. 추워서 덜덜 떠니까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서 덮어주기도 했다. 그런 거 로망 가지고 있던 나였어서 어찌나 좋았는지 포근하게 무릎에 덮인 J군의 재킷에서 나는 몽글몽글한 향수 냄새 때문에 잠이 왔다.
매일이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 하나로도 힘이 나고 행복해지고 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살게 되었었다. 점심을 먹어도 똑같은 점심이 아닌 함께 먹는 점심이기에 더 뜻깊었다. 한 번은 급식 대신에 도시락을 싸 준 적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온갖 로망이란 로망은 다 J군 덕에 채웠던 것 같다.
자상하고 착하고 귀엽고 내 눈엔 최고의 남자 친구였던 J군. 그렇게 가기 싫던 학교가 너무 좋아지고, 공부도 더 열심하 하려고 하게 되고 멋진 여자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냥 더 나은 모습 발전된 모습으로 더 예쁘게 사귀고 싶었고 앞으로 함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 그냥 난 평생 캐나다에서 함께 고등학교만 다니고 있을 거라, 그때 누리던 생활이 인생의 전부일 거라 착각했다. 그렇게 두 학기가 지나고 그저 무난하고 평범하게 잘 사귀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J군이 미국 유학을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