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배우 차태현 같은 사람은 몇 번이고 헤어졌지만 결국엔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했다고 한다. 또 얼굴이 알려진 여러 연예인들이 첫사랑과 결혼했다고 방송에서 본 적 이 있다. 그저 흔하지 않을 뿐, 첫사랑과의 사랑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소수의 사람들에 속해지지 못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든 과정이 너무나도 찬란했기 때문에 첫사랑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 설렘이 내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기분이 든다. 사람이 너무 힘들 때면 자연스럽게 좋았던 때를 기억하며 고통을 이겨내기도 한다고 한다, 나는 사는 게 힘들다 느낄 때 고등학교 때의 시절 그리고 나의 첫사랑을 생각하곤 한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오글거리고 토글 거리는 유치함이 찬란한 시절이었지만 그때 내가 가장 사랑스러웠고, 반짝였으며 매일이 꿈속에서 사는 것만 같았었다. 하, 옛날 일을 곱씹으며 웃음 짓는 나를 보니 정말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첫사랑의 정의는 뭘까. 돌이켜보면 난 유치원 때도, 초등학교 때도 계속 짝사랑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기억에 남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기에 나는 내 마음속의 첫사랑을 그 사람으로 정하고 32년을 살아왔다. 나의 첫사랑은 캐나다에서 유학할 때 학교에서 만난 한 살 차이 나는 J군, 이상하게도 그 오빠한테는 ‘오빠’ 소리가 낯간지럽고 어색해서 늘 반말을 했었다. 처음엔 동성친구만큼 허물없이 지냈었다. 털털하고 착하고 어딜 가나 사람들의 중심에서 많은 사람들을 웃겨주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는데 특별히 얼굴이 잘나지도 않았고, 키가 대단히 크지도 않았지만 이상한 끌림에 그 사람을 늘 가까이하고 싶었고, 제일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모범생인 친언니의 유학길에 1+1으로 언니가 유학을 가니, 너도 따라가라라는 식의 캐나다 유학길을 떠난 거였고. 자연스럽게 언니와 함께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J군이 우리 언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언니도 그때가 가장 빛나던 때였는지, 인종 구별 없이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 시절이었고. J군 또한 언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도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언니는 예뻤고 머리도 좋았다. 한 학교에서 7명이 동시에 언니를 좋아했다고 하면 뭐 말 다했지.
J군이 언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게
쓸데없이 밤마다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시험 범위가 어디인지,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를 가자는 둥, 정말 그야말로 쓸데없는 걸로 한 시간씩 통화를 하는데
그 꼬락서니가 어찌나 보기 싫고 화가 나던지. 그때는 그 감정이 질투 인지도 몰랐다.
언니와 J군의 전화는 이틀에 한 번꼴로 매일 무슨 루틴처럼 지속이 되었는데 그 꼬락서니를 볼 때마다 내 안에 불이 난 것처럼 속이 답답하고 아프다가
나중에는 그 감정이 내 친한 친구가 언니를 좋아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언니를 좋아해서 생긴 감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나 풋풋한지
푹하고 웃음이 나오지만, 그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지고 내 가슴이 녹아 없어지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싶을 정도로 첫사랑의 아픔을 느꼈었다.
J군이 언니를 좋아한다니. 안 그래도 나와 너무 다른 언니 때문에 언니보다 덜 똑똑하고, 덜 예쁘고 모든 게 덜한 나는 비교대상으로만 살아왔는데 J군까지 언니가 차지하게 된다니, 그 가슴에서 용암이 소용돌이치는 기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언니랑 J군과 통화를 하면 똥 씹은 표정으로 문을 쾅 닫아버리거나, 일부러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싫은 티를 많이 내고 살았었는데 평소 표정관리를 잘 못하는 나는 J군을 좋아하는 티를 나도 모르게 팍팍 내게 되어서 선생님들까지 알 정도로 뚜렷한 3각관계를 형성되었다.
워낙 내가 언니한테 싫은 티 내고 온갖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대화도 안 하니까 어느 날 언니가 자기 전에 한마디 했다.
“야 나 걔 안 좋아해. 네가 걔 좋아하는 거 아는데, 그리고 애초에 난 걔 별로니까 나한테 짜증 좀 내지 마”
언니는 J군을 그냥 친한 동생 정도로 여긴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했다. 실제로 언니가 좋아한다는 사람은 그 당시 학교에서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오빠였고. 둘은 썸을 타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그 당시 나의 하루는 J군으로 인해 매일매일 백만 번씩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었는데, 언니의 그 한마디에 다시 세상이 흑백에서 조금씩 예쁜 색이 물들어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밸런타인데이날,
나도 내 마음을 정식으로 표현하고자, J군의 라커에 초콜릿을 넣어놨다. 큰걸 사주면 “난 널 이만큼이나 좋아해”라는 걸 알아줄까 봐, 보이는 것 중 가장 큰 걸 사서 넣어두었다.
수업 내내 J군이 선물을 봤을까? 궁금하고 떨려서 심장이 요동치고 명치끝이 간질간질하고 하루 종일 고백하고 답변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설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얼굴도 마음도 하늘에 떠있는 풍선처럼 상기된 채로 둥둥거리며 다녔는데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가려고 라커룸을 지나가는데 복도에 누군가의 손이 보이고
그 손에는 큰 가방이 들려있었다, 알록달록 예쁜 포장지가 삐쭉 나와있는 상당히 커 보이는 밸런타인데이 선물가방.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지 라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아 - 또 CC가 생기나 보네, 아주 좋겠구먼” 하고 친구를 만나서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 가방 앞에 우리 언니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설마. 에이 아니겠지? 하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그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니 J군이 한껏 상기된 얼굴로 언니에게 선물을 내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반대로 뛰어가 화장실에 쳐 박혀서 드라마처럼 주먹으로 입 막고 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물 받아줄 J군 생각에 명치가 간질간질하고 설레고 벅찬 느낌에 행복했는데, 그 간질거림이 칼날로 변해서 마구마구 가슴에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나머지 수업이 어떤 수업이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고. 눈은 탱탱 불어서는 아픈 사람처럼 엎드려만 있었고, 이동수업이 있어서. 라커룸을 지나갈 때 JJ군이 라커룸을 그제야 확인하는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혹시라도 마주칠까, 누구보다 빠르게 피해서 지나가려는데 J군과 눈이 마주쳤다. J군이 내게 말을 걸려고 하자 눈치 빠른 친구들이 나를 질질 끌고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데려갔다.
친구들이 아무리 위로를 해줘도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고 그저 내 아픈 상처만 크게 벌어져서는 두 근 두 근대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집에 가서 몇 년에 흘릴 눈물을 하루 만에 다 흘린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울었다. 고작 첫사랑 실패일 뿐인 건데, 그 당시 나에겐 세상의 중심인 사람이었기에 정말로 내 세상이, 내 행복이 무너진 느낌을 받았었다.
그날 메신저로 학교에서 제일 나이 많던 오빠가 연락이 왔다
“J가 엄청 미안해하는 거 같다고, 남아서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애들 많은 데서 초콜릿 준거 생각이 짧았다고 너한테 상처 준 것 같아 미안해한다고”
지금 머리 다 크고 나서는 그 당시에 직접 사과를 하면 되지 왜 남을 시켜서?라는 생각이 드는데 뭐가 됐던 그날, 너무 울어 눈이 빠질 것만 같아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메신저도 꺼버리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리고 울다가 잤다. 정말 그 당시 이 구역의 제일 슬픈 년은 나였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365일 밥 거르는 일이 없던 나인데 저녁도 안 먹고 배 겟잎을 축축하게 모두 적셔버릴 기세로 울다가 욕하다가 원망을 하다가 그렇게 잠들었다.
다음날 학교를 가기는커녕
불어 터진 눈 때문에 시력 감소가 온 것이 아닌가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앞이 안보였고. 하루 종일 울어서 관자놀이에서 누가 북을 치듯 울려와서 고통스러웠다. 이게 첫사랑의 후유증이란 말인가? 다시는 사랑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을 했었다. 아무도 좋아하지 말아야지. 정말로!
학교를 안 가고 집에만 있으니 너무 심심했다. 학교가 끝날 때쯤 메신저에 들어가니 친구들이 괜찮냐고 연락을 해 왔고. 그럭저럭 묵묵하게 대답을 하고 있었는데 J군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 왜 학교 안 왔어?”
알면서 묻기는 왜 묻냐고. 너무 슬퍼서 눈퉁이 탱탱 불어 못 갔다 왜. 하고 싶었지만...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그냥 좀 아파서”
평소 같으면 온갖 이모티콘 섞어서 대답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가 아팠어? 너 튼튼하잖아”
“아프지 마, 약 먹고, 밥도 많이 먹고 푹 쉬어”
내가 한참 대답이 없자,
“미안해”
한마디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세상에 “미안해” 한 마디가 그렇게 가슴 아픈 단어인지 처음 알았다. 그대로 키보드에 손을 올려둔 채 컴퓨터 화면에 떠있는 “미안해”라는 단어를 보고 가슴 깊숙이 박혀있던 그 헤아릴 수 없던 복잡한 감정을 눈물로 쏟아냈다. 그 미안해라는 말이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내가 그대로 차였구나, 이게 차인 거구나. 내 첫사랑이 이렇게 거지같이 끝나는구나.
그리고 아무 대답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메신저를 로그아웃했고,
내 첫사랑에게서도 로그아웃 해주었다.
매일 장난치고 놀던 J군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왜냐면 나는 차였기 때문에 딱히 차였는데 매달리기 싫었고 또 나는 차였지만 친구로 남는 그런 쿨한 사람은 아니었다.
3개월가량을 말 한마디 없이 한 학기를 그렇게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같은 수업을 들어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멀리 떨어져 앉았다. 친구들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그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당시 마음 맞는 친구들이 많아 편하게 첫사랑을 잊어갈 수 있었다.
중간중간 J군이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모조리 다 무시하고 살았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대답해서 다시 친구로 지내자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말을 들으면 다시 무너져 내릴까 봐 피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