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올레샤, <리옴빠>
유리 올레샤의 섬뜩한 재능이 담겨있는 시적인 단편들이다.
올레샤 같은 작가는 늘 어렵고 조금 망설이는 느낌이 들게 하는데, 이를테면 3-40페이지 내외로 캐릭터와 분위기 파악이 끝나면, 소설의 지평이 가늠되는 그런 평범한 작가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짓 쓰윽 흘겨보는 척하다가 책을 집는 손 위치를 새삼 바꾸게 되는, 다시 말해 정좌로 독서를 원하는 그런 작가들에 속하는 부류라는 뜻이다.
모든 좋은 단편이나 영화가 그런 것처럼
예측을 불허하는 전개와 시점을 자유로이하며, 캐릭터의 섬세한 감정선과 사물-공간에 대한 묘사를 다각화하는 시점컷이 어우러져 인상적인 장면을 연속으로 만들어내며 참다운 독서의 유려한 호흡을 원한다는 것이 그의 문체의 특징이다. 지나치게 시적인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이렇게 능수능란한 화자를 우리는 쉽게 만날 수 없다. 현대에 와선 거의 힘들다.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뼈대만 빼놓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얻게 되고 마찬가지로 그 불안한 근거 때문에 이 짧은 단편들을 계속 읽어가게 된다.
무엇이 이 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가?
예언자란 누구인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은?
소비에트체제 아래 쓰인 이런 글쓰기는 체제에 대한 환상을 역으로 어떻게 이용하는지 그러면서도 보편성과 설득력을 획득하고 마는 대단히 좋은 사례가 될 듯싶다.
올레샤의 물 흐르는듯한 문체와 장면전환의 스타일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강력한 페이서스와는 사뭇 다르면서도 비슷한 절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플라토노프의 단편들이 뭐랄까 순전한 작가의 경험이란 재료를 통해 의식적인 노력으로 얻은 무엇이라면, 올레샤는 삶 자체의 호흡이 그런 글을 보여주는, 순전한 재능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냥 아름답기만 한 글쓰기가 아니라는 것은, 시절의 비극성을 가려놓은 잊지 못할 캐릭터와 사건의 암시성이 기교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선 지평 위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가들.
이야기들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여 기꺼이 뒤따르고 싶은, 존경심을 준비하게 하는 숭고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단편들.
리옴빠, 리옴빠, 버찌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