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유 JOYU Oct 27. 2022

당신이 모르는 진짜 승무원의 삶.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은 가끔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는 이야기를 한다.


"승무원은 공짜로 여행하면서 돈 버니까 좋겠어요."

"긴 비행은 중간에 쉬면서 가니까 편하겠다."

"매번 호캉스 하고 완전 꿀 아니야?"


정말 좋겠다는 건지, 늘어진 팔자 같은 삶이 좋아 보인다는 건지 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틀린 말만 인 것도, 맞는 말만 인 것도 아니다. 이제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하하하고 웃어넘긴다. 예쁜 유니폼을 입고 전 세계를 누비면서 이 호텔 저 호텔에서 호캉스(?)를 하는 직업이 승무원에 대해 틀린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오로지 그렇기만 하냐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는 않다.



종종 시차 적응하는 게 어렵지 않냐고 묻는데 실은 승무원들은 적응할 시차라는 게 없다. 왜냐면 나라가 바뀔 때마다 계속 시간이 바뀌기 때문에 지금을 몇 시로 살지는 그저 내가 정하면 되는 것뿐. 고로, 내가 일어난 시간이 아침이고 내가 자는 시간이 저녁인 게 승무원만의 시곗바늘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내가 정한 저녁에 잠이 그렇게 막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다. 불면증이 있어서 못 자고 비행 갈 때가 태반이라, 랜딩 후 호텔에 도착하면 눈만 뜨고 있는 인형일 때가 많다. 그럴 때는 레이오버고 구경이고 나발이고 유니폼을 집어던지고는 그냥 침대에 누워 미 동한 번 없이 열네 시간씩 잠에 든다. 이렇게 몰 아자는 잠은, 일어나면 어깨부터 목까지 뻐근하게 근육이 뭉쳐 일어남과 동시에 머리를 울리는 두통이 함께 한다. 그래도 푹 잠든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렇게 시체 럼 자다가 일어나면 비몽사몽 한 눈으로 익숙하게 룸서비스를 시킨다. 룸서비스를 시킬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하다. 승무원이 되기 전에는 호텔 룸서비스 메뉴판조차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무슨 김밥천국 메뉴판처럼 익숙하게 본다. 아무리 메뉴가 많아도 매번 김밥과 라면을 시키듯 이제는 더 볼 것도 없이, 습관처럼 버거 앤 칩스를 시킨다. 아, 영혼의 동반자 제로콜라도 함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뜨며 입에 맛도 모를 음식을 꾸역꾸역 넣다 보면 괜히 콜라를 얹으며 소화가 된 것 같은 플라세보에 취해본다. 요즘 유행하는 맛 중에 '배민 맛'이라는 게 있다. 배달의 민족에서 음식을 시켜 먹다 보면 어떤 음식을 시키듯 묘하게 같은 맛을 내는데 그게 바로 배민 맛이라고 한다. 


나 역시도 한국에서 자가격리할 때 14일 동안 수없이 배달음식을 먹을 때 이 배민 맛에 물려 나중에는 밥을 먹는 것 자체가 꺼려지던 날이 있었다. 그런 것처럼 내가 부르는 것 중에 '룸서맛'이라는 게 있다. 전 세계의 어느 호텔에서 시키던, 어떤 메뉴를 시키던 룸서비스는 대게 다 일정한 맛을 낸다. 


그래도 호텔이기 때문에 항상 평균의 맛은 보장하고 편리해서 좋다. 그리고 호텔마다 메뉴가 조금씩은 다르기 때문에 종종 골라먹는 재미도 있고 잘 애용하고 있다. 하지만 복불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바뀌었지만 전에 쓰던 런던 호텔에 '공포의 김치볶음밥'이 있다. 내가 모든 친구들에게 주문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이 김치볶음밥은 정말 공포의 존재다. 


우리 모두 런던 백투백(back to back)을 하던 시절에 다들 외출은커녕 룸서비스와 잠으로 런던 레이오버를 도배했었다. 이때 비행기에서 늘 등장하던 화두가 '그나마 먹을만한 룸서비스가 뭐냐'였다. 


이 호텔은 '크루' 룸서비스 메뉴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승무원들만 주문할 수 있는 룸서비스 메뉴판이 따로 있다. 당시 호텔에는 우리 회사 말고도 많은 승무원 회사들이 묶고 있었기에 특별히 준비된 것이었는데 그중에 한국 항공사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메뉴판에 반가운(?) 김치볶음밥이 있었다. 


나는 김치 파는 아니지만, 한국인이고 타지에서 한국의 것을 보면 너무나 반가운 기쁨에 취해 겁도 없이 이 김치볶음밥을 시켰다. 이때 나는 아마 대단히 무언가 잘 못되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렇게 독특한 장소에서 한국 메뉴를 보면 일단 피하고 본다. 왜냐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니까. 




잠시 후 내가 주문한 김치볶음밥 와 어니언링이 뜨끈하게 방문 앞으로 배달 왔다. 20시간째 공복을 달리던 뱃속에서는 천둥이 울리고 있었고 야침찬 기대와 함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뚜껑을 든 채 한참을 서있었다. 김치볶음밥이지만 김치가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것과 같은 논리로 받아들이기에는 김치의 민족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한국인에 대한 기만이었다. 어르신들이 먹는 것으로 장난치면 혼난다고 했는데 진짜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정체모를 양파와 염색용 빨간 가루를 한참 보고 있다가 어이없음에 콧웃음이 터졌다. 그랬더니 내 거친 콧바람에 이 매가리 없는 밥풀이 훅 날리며 졸지에 쌀 한 숟갈을 허공에 흩어졌다. 아, 엄마 보고 싶은 순간은 이런 걸까.


그렇게 의리와 다짐으로 파이팅을 외친 후 두 숟갈을 간신히 먹었지만 결국 백기를 흔들며 그릇을 밀었다. 그가 이 날 어니언링이 배고픈 유생을 살렸고, 이 호텔은 그렇게 <어니언 링 맛집>이라는 고귀한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밥을 구경하고 옆동네 항공사를 다니는 언니 방에 잠깐 놀러 갔다. 언니가 감사하게도 미리 쇼핑해둔 도리토스를 챙겨줬다. 언니가 준비를 하는 동안  한참 수다를 떨다가 출근하는 언니를 배웅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잠을 청하기 위해서 누웠지만 김치볶음밥에 놀랜 가슴 쉬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호텔을 다니면서 생긴 한 가지 버릇이 있는데, 잘 때 무조건 한 가지 불을 켜놓고 잔다. 예전에 150시간의 듀티 아워를 소화하던 날 중에, 졸도한 듯 방콕 호텔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중간에 한번 깼는데, 어둠 속에서 순간 내가 어딘지, 지금 몇 시인지 모를 공포에 패닉이 왔다. 과호흡 끝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듬더듬 불을 켜고 주변을 보고 그제야 아 나 오늘 방콕이었지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뒤로는 잘 때 작은 불 하나를 켜고 자, 중간에 깨도 놀라지 않고 여기가 어딘지 알고 다시 편하게 잠에 든다.





모든 것은 본인이 얼마큼 만족하고 즐기냐에 따라 다르다. 쉼 없이 바뀌는 나라와, 호텔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 안에서 좋은 것을 발견해서 거기에서 행복을 찾고 만족할 수 있다면 매 비행이 힘듦보다는 기쁨으로 채울 수 있다. 


종종 친구들이 일하는 거 안 힘드냐고 물어볼 때가 있는데 어디 힘들지 않은 직업이 있겠냐 싶다. 유명한 인터넷 짤 중에 "돈 내고 다시는 학교도 이렇게 거지 같은데, 돈 받고 다니는 직장은 어떻겠어."라는 게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찡그리고 출근하면 생이 너무 안쓰럽지 않은가


도덕책에나 나올 것 같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지만 항상 작은 것에도 만족을 찾으려 하고, 힘들 비행일수록 스스로를 좀 더 아껴주며 비행에 나서는 나를 다독인다. 



또 다시 늦은 밤 비행기에 오른다. 잠은 여전히 부족하고 온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코끝에 부는 선선한 바람에 웃음이 난다. 



이전 08화 승무원이 웹소설을 씁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