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 북클럽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문해력 비밀을 알고 싶다. 문해력이 이렇게 바닥인 이유 말이다. 이 바닥의 비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지만 글쎄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 우리 때보다 훨씬 더 어린 시절 책을 풍부하게 체험한다. 하지만 그들의 문해력은 지속적으로 의심받는다. 왜일까. 우리는 어땠 지? 문해력이 좋은 (혹은 좋다고 주장하는) 세대의 경험을 잠깐 들춰볼까 한다.
고전 문학을 읽기 시작한 건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첫 고전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나는 스타트 신호를 받은 사람처럼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고전문학을 집어 들었다. 삼성세계문학전집 100권 중의 한 권이었다. 주인공 조던은 스페인의 전쟁터에서 마리아를 만났다. 둘이 침낭에 들어가 사랑을 나누던 장면을 읽고 또 읽었다. 납득이 가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침낭 속 사랑은 납득할 필요가 없었다. 파시스트란 어렴풋이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독재자 무리인 것 정도만 알았다. 고전인지 포르노인지 나에게 불분명한 의미를 남긴 작품이었다.
그때부터 아빠가 허세로 들여온 세계문학전집은 제 역할을 찾았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좁은 문> <대지>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같은 고전을 쓱쓱 읽어나갔다. 다독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고등학생이 되자 이 전집을 아주 천천히 읽었다. 늘 곁에 두고 틈날 때 읽었다. 공부를 대충 하던 내가 수능 모의고사를 잘 보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로부터 드디어 공부를 조금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교육계에 있었다면 독서 이력을 파헤치고 상관관계를 논했겠지만 그땐 그냥 수능이 재미있는 시험이구나, 정도만 알았다.
요즘 초등학생과 달리 초등학교 때 독서는 별 볼 일 없었다. 아버지가 사다 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야기>라든가 <세상에서 가장 웃기는 이야기> 등이 실린 60권짜리 문고판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이 책만 읽다시피 했는데 중학교 때 고전을 읽는 데 무리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결정적으로 나에겐 요즘 아이들이 책 읽기를 극단적으로 그만두는 중학교 때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누구의 개입도 없이. 이 사례가 문해력에 대한 생각의 단초가 되었다.
초등 때 고전을 읽히려고 무리할 필요가 없다.
중학교 때부터가 진짜 책 읽기가 시작되며, 이때 뇌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고전은 단순히 문해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정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철학 수업을 좋아해서 전공보다 더 즐겁게 수업을 들었지만 이렇다 할 문해력 상승은 확인할 수 없었다. 문해력이 뛴 건 대치동의 수능 언어영역 스타강사의 연구실에서 언어 영역 모의고사 문제를 만들 때, 출판사(인문학, 사회과학)에 들어가서 저자의 글을 교정하고 기획하고 글을 썼을 때,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헤겔의 <정신 현상학> 강독 수업을 들으며 공부했을 때이다. 한 문단 읽는데 2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그 이상도 걸렸다.
글은 왜 읽고 배우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타인과 말과 글로 소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타인에게 조리 있게 이야기하고 경청하고 다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지난 8년 간의 독서 모임을 통해 깊이 알아가게 되었다. 20대에도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출판사 다니면서도 독서 모임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적극적은 대화에는 실패했던 것 같다. 책에 대해 내 의견을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눈 기억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독서 토론은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화는 발설 이후가 중요하다. 발설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서 괴롭힌다. 그 말이 미흡했다면 왜 미흡했는지 다시 생각해서 대화를 수정하고 완성한다. 잘했으면 잘한 대로 자신을 칭찬하느라 뇌가 열일을 했다. 발설 이후는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분명해진다. 최근엔 대화가 글을 쓰게 한다는 걸 알아가고 있다. 친구들과 글을 읽고 대화 후 에세이를 쓰다 보니 대화가 글을 쓰는데 결정적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동안 왜 이걸 놓치고 있었던가. 유레카다. 글은 읽는데서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발설해야 하고 발설하면 숙성되고, 그러면 글을 훨씬 수월하게 잘 쓸 수 있다. 함께 읽기란 차원이 다른 독서다.
적당한 결론을 내리자면 중학교 때부터가 진짜 독서가 시작된다. 이때 좋은 고전 책들을 읽는 게 좋다. 대화를 나누고 쓰기로 마무리짓는다면 이 이상 좋은 독서는 없다. 어려운 고전일수록 함께 읽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깨달은 문해력의 비밀이라면 비밀이다.
드디어 내 경험을 나누어도 좋겠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6월의 일이다. 북클럽을 열었다. 시작한 지 5 달 만에 반이 3개가 생겼다. 곧 4개가 될 예정이다. 수업 문의 전화를 받으면 택배를 기다릴 때처럼 마음이 셀러고 좋아 죽을 것 같다. 막상 학부모와 통화를 끝내고 반이 구성되면 택배 상자를 열어보고 물건을 수납한 뒤처럼 기쁨은 자취를 감추고 두근두근 두려움이 앞선다. 전화를 끊는 순간 그만둘 순간을 대비하는 소심한 마음도 빠르게 솟아나기 때문일까. 반면 어떤 날은 수업을 문의를 받고 부동산 페이지를 열어서 사무실이나 원룸 등을 폭풍 검색하고 월세와 수입을 따져본다. 나는 방이 2개이고 해가 잘 드는 사무실에 앉아 가르치는 아이들이 넘쳐나서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지경을 꿈꾼다. 남편이 이런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돈은 있어?"
아이들이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떤다. 집을 깨끗이 치우고 간식도 마련하고 예쁘게 입고 앉아서 기다렸다. 두근두근, 아이들이 늘자 처음의 두근두근은 걱정스러운 두근거림으로 바뀐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지나치게 똘똘한 애가 오면(영재 포비아도 있나?) 더 겁을 먹는다. 재미가 있나 없나 매번 확인하고 싶다. 수업에 참여하는 내 아이가 재밌다고 진심을 말해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학부모가 전화로 "너무너무너무 재밌대요"라는 후기를 들으면 당일은 날아갈 것 같지만 다음날부터는 이 "너무너무너무"에 집착해서 무리하는 내가 떨고 있다. 이 상태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혼자 고민한다. 아이들도 나처럼 고전을 읽으며 인생의 답을 찾고 위로를 받을까?
아 북클럽은 떨고 있는 북클럽이지만 이름은 푸르고 아름답다. 연두 북클럽. 이 북클럽은 중학생의 고전 읽기를 위해 문을 열었다(수업은 초등학생부터 권합니다만). 아이들이 책 읽기를 그만두는 시기에 투입되는 특수부대원의 마음가짐으로 수업을 준비한다. 이 마음가짐이 실력으로 증명되어야 하겠지. 이 마음가짐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방황하던 나에게 위로가 되고 답을 주었던 고전의 힘이 아이들에게 가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