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준이 엄마

나 허순이 엄마잖아!

by 따바라중독자

시장 속 치과에서의 한가한 오후, 아무도 없는 지루한 병원에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긴 한 아주머님이 들어오셨다. 병원의 경력자라면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진상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진~한 냄새다.

호준이 엄마다.


역시나 인사 패스와 반말 공격 시작이다.


"안녕하세요~"

"......"

"어머님이 진료받으세요?"

"어."

"그럼 접수증 적어주세요~"

"처음부터 쓰라 아이 하니? 나 허순이 엄마잖아! 기냥 접수하믄 되지, 으찌 이걸 다 쓰니?"

"접수하시려면 개인의 주민번호를 따로 알려주셔야 해요."

"내 지금 모른다고 무시하는 기야?"





'허순이 엄마'는 조선족이다. 하... 지난번에도 이분한테 온 기를 다 빨렸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접수부터 힘이 쭉쭉 빠져 집에 가고 싶다. 엄마 보고 싶다.


- 왜 우는 애한테 자꼬 울지 말라 기래? 아프다잖아!

- 치료비가 왜 이르케 마이 나와? 뭐 했다고 만 오천 원이니? 당신들 뻥치지 말라~!!! 내 신고 할기야!!!

- 내 남편이 누긴지 아니? 공무원이다!! 당신들 다 각오하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계속 둥둥 떠다닌다. 대부분의 진상님들은 저렇게 화가 나는데도 또 찾아주신다. 저렇게나 우리를 신고하고 싶어 하셔서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지.





호준이 엄마는 하필 돈이 많이 들어가는 치료를 해야 했다. 충치가 깊어 신경치료를 하고 이를 싸야 했는데, 그러려면 최소한 5번 이상은 올 텐데. 절망스러웠다. 5번이나 저 아줌마를 봐야 하다니.


그런데 신기하게도 호준이 엄마는 치료를 받을수록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말도 없어지고 '만 오천 원'이 넘는 치료비도 잘 내며,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다행스럽게 아무 일 없이 치료를 마무리하고 치아보철치료(신경치료를 한 치아는 약해지기에 치아 전체를 감싸는 크라운 보철을 해야 한다.)를 위해 본을 뜨고 임시치아를 만드는 날이었다. 열심히 환자분 옆에서 임시치아를 깎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줌마가 갑자기 의외의 말투로 말을 건다.


"이론고 할라믄 많이 배워야디?"

"예? 아... 이거 치아 깎는 거요?"

"어. 이론 기술 가지고 있어 좋겠네. 기술 있어 부롭다. 내는 무식하고 가진기 엄써서 악착같이 살아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큰소리만 치던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랬나 보구나. 사람들이 무시할까 봐 더 소리치고 더 억지 부리고, 나한테 이 나이에 엄마 보고 싶게 하고.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는 미움의 빗장이 슬그머니 풀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오신 거예요?"

"어. 건너왔는데 먹고 살 일은 없고 청소하다가 운 좋게 남편을 만나 애기를 늦게 낳아서. 사람이 배워야 돼. 나는 못 배워서..."


이 조선족 아줌마 끝까지 미안했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러나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이분의 인생이 어느 정도 짐작은 되었다. 평소 썩 호감이지는 않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잠시 저쪽에 내려두고 그저 인간으로서, 나라면 다른 나라 가서 허드렛일 하며 살 수 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다.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저렇게 아무한테나 소리치고 살지는 않을 거야.


미안하다는 말은 안 했지만 뭔가 마음의 변화가 있었기에 저런 말도 했겠지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람들, 조선족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들이 많고 나부터도 조선족들의 것이라는 이유로 마라탕을 먹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약해 보이면 안 되었겠지. 그러나 못 배웠다는 말로 잘못된 행동이 포장될 수는 없다.


호준이 엄마는 그 후 내가 그곳을 나가기 전까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대신 공무원이라는 남편분이 치료를 받으러 오셨었는데 부부는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툴툴거리기 일쑤여서 참 난감했다. 어느 날은 호준이 아빠가 치료받고 가려는데 마침 진료실의 형광등이 꺼졌다. 아저씨는 주저 없이 그 형광등을 갈아주셨다! 이 가족은 다들 반전이 있었다.





좁은 소견으로 사람을 눈앞의 모습만 보고 혼자 마음속으로 평가해왔던 나는, 때 호준이네 가족을 만난 후로 사람은 참 여러 겹으로 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한테는 온갖 무서운 단어를 토하듯 내뱉었던 호준이 엄마도 한 때는 사는 게 힘들었던 한 명의 소녀였고, 무뚝뚝하고 불만 많은 호준이 아빠도 낯선 이들에게 본인의 수고를 고민 없이 줄 수 있는 이타적인 면도 있는 것이었다. 장소, 사람, 상황에 따라 같은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나는 한 번도 그전까지 그런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았을까.


다양한 사람 속에서 각자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표현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람 사는 일을 풍요롭게 한다. 사람마다 수천 개의 다른 모습의 우주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서로에게 해와 바람과 비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모르고 산다. 소리를 지르고 고집스러운 비를 뿌려대는 환자는 나를 힘들게 하지만, 나와는 다른 재질과 겹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그 사람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는 햇님이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화는 쉽게 가라앉는다. 내일은 또 누가 어떤 종류의 우주를 품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가능하다면 서로가 태풍과 추위 대신 훈풍과 봄햇살을 주고받으면 좋겠다.


사진출처 :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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