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2025년 3월 5일 오후

by msg

"과거를 기억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
- 조지 산타야나 (George Santayana)


익숙한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엔진을 끄자, 잊고 있던 소리들이 밀려왔다. 우체부 오토바이의 체인 소리, 이불을 터는 둔탁한 소음, 비에 씻긴 시멘트 냄새. 굽이진 언덕을 따라 낡은 주택들이 어깨를 맞대고 섰다. 삐걱이는 대문 너머 화단에는 제철을 깜빡한 봉숭아가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 스무 해 넘게 살았던 동네. 췌장암 4기, 3개월 내 시나리오 초고. 서로 다른 무게의 족쇄 두 개를 발목에 찬 채, 나는 결국 이곳으로 돌아왔다. 남은 시간을 가족과 보내겠다는 다짐과, 글쓰기에 가장 익숙한 자리를 택하려는 실용이 뒤섞인 귀향이었다. 차 문을 닫자 허리 깊숙한 곳에서 낡은 나사가 한 번 돌 듯 둔통이 스쳤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낡은 나무 문이 시간을 머금은 신음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머니, 이자경. 쉰여섯의 나이가 무색한 단단함이 있었지만, 눈가의 주름은 이전보다 깊었다. 오랜 세월을 한 줄 한 줄 베껴 적은 원고의 행간 같았다. 이제 저 얼굴에 가장 깊은 주름을 새길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네! 밥은 먹고 다니는 거니? 얼굴이 왜 이렇게 더 야위었어?"


말보다 먼저 팔이 나를 감쌌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 냄새, 설거지로 거칠어진 손등의 감촉.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엄마, 나 괜찮아. 걱정은 나중에 하고… 밥이나 줘. 배고프다.”


소파 등받이에 반쯤 걸터앉아 게임을 하던 동생 현수가 벌떡 일어섰다. 스물여덟, 어엿한 직장인이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능청스러운 막내였다.


"형! 이게 얼마 만이야? 갑자기 온다 그래서 깜짝 놀랐잖아."


나는 그저 미안했다. 글만 쓴다는 핑계로 일 년에 한 번 얼굴 비추기도 어려웠으니.


저녁 식탁은 어머니의 정성으로 가득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된장찌개, 윤기가 흐르는 흰쌀밥. 어릴 적부터 내 미각을 지배해온 익숙한 맛이었지만, 모든 음식이 모래알을 씹는 듯했다. 나는 꾸역꾸역 밥을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며 내내 흐뭇해하셨고, 현수는 최근 회사에서 겪은 일들을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평범하고 따뜻한 일상. 이 풍경을 다시 보는 데 평생이 걸렸다.


‘한 번이라도 더 올 것을.’ 후회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고 자부했는데, 착각이었다.


밥을 먹던 중,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놋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맑게 울렸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엄마, 현수야. 할 말이 있어."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향했다. 왁자지껄하던 식탁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현수의 젓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차분하게, 담담하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입술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췌장암 4기래. 1년 내외로 남았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식탁 위에는 무덤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김이 오르던 된장찌개가 순식간에 식어버린 듯했다. 어머니의 손에서 젓가락이 떨어지며 '딸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현수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셨다. 어머니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두 줄기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길을 냈다.


"현우야… 이게… 무슨 말이니…."


현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붙잡았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슬픔보다 분노와 불신이 먼저 서렸다.


"형, 거짓말이지? 형 멀쩡하잖아! 오진 아니야? 다른 병원도 가봤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나를 다그치는 데만 익숙했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내가 선택한 '마지막'은 가족의 응원 속에서 완성되어야만 했다. 테이블 아래에서 떨리는 무릎을 애써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현수야. 나 괜찮아. 근데 내가 할 일이 있어."


나는 노트북 가방을 가리켰다. 식어가는 밥을 한 술 떠 억지로 입에 밀어 넣었다. 눈물과 함께 밥을 삼켰다.


"평생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어. 내 20대 삶을 담은 이야기야. 내 마지막 작품이 될 거야. 그걸 3개월 안에 완성해야 해.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걱정보다 응원이야. 내가 끝까지 이 작품을 잘 마칠 수 있게, 힘을 줬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흐느끼던 소리를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현수의 붉어진 눈에서도 의문과 함께 미약한 빛이 스쳤다. 그들은 내 눈에서 체념이 아닌, 꺼지지 않는 불꽃을 보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힘은 뜨거웠다.


"그래… 그래, 현우야. 우리 아들이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고 싶다니… 엄마는 자랑스럽다. 엄마가 미안해. 아들 그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도 결연함을 담았다.


현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형, 내가 뭘 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말만 해.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설거지, 빨래, 청소, 모든 집안일 형은 금지. 뜨거운 거, 무거운 거, 몸 쓰는 건 다 내 몫."


“그건 평소에도 네 몫이었다.”


어머니가 눈물 사이로 타박을 건네며 짧게 웃었다. 셋 모두가 아주 잠깐, 같은 쪽으로 호흡을 맞췄다. 그 웃음이 방 안 공기의 고도를 한 칸 낮췄다. 내가 써야 할 '마지막 대본'은, 단순히 나의 성공과 좌절만 담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을 빚어낸 이 오래된 풍경, 그 안의 가족, 그들과 함께 만들어간 '가장 보통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어야 했다.


밤이 와서야, 나는 오래 비워두었던 내 방으로 들어갔다. 벽지는 여전히 엷은 베이지, 하지만 공기는 묵지 않았다. 어머니가 매일같이 환기한 흔적이었다. 책상 위에는 내가 두고 간 낡은 책들이 각 맞춰 꽂혀 있었고, 서랍을 열자 유년의 잡동사니들이 담긴 상자들이 보였다.


상자마다 어머니의 단정한 글씨로 라벨이 붙어 있었다. ‘고등 국어 노트. 2012-2014.’, ‘각종 공모전 낙선작 모음. 버리지 말 것.’ 어머니는 약 상자에만 라벨을 붙이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아들의 실패한 시간에도 그렇게 꼼꼼히 이름을 붙여 보관하고 있었다.


나는 서랍 가장 안쪽에서 먼지 쌓인 낡은 다이어리 한 권을 꺼냈다. 손때 묻은 갈색 표지.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그 차가운 가죽의 감촉을 느끼며, 익숙한 필체의 굴곡을 손끝으로 더듬는 순간, 아득한 유년의 풍경이 한 장면씩 켜졌다.


나의 10대는 재능의 편린들로 어지럽게 반짝였다. 며칠 밤을 새워 몰두했던 아크릴 물감 세트는 벽 한구석에서 뚜껑이 굳어갔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연습했던 기타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구석에 세워졌다. 나는 무엇이든 남들보다 빨리 배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새로운 것을 정복하는 희열은 금세 식어버렸고, 그 너머의 깊이로 나아갈 애정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모든 걸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그 무엇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다른 얼굴이었다.

어느 날 밤, 거실에서 TV를 보던 어머니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꿈이 뭐였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모컨을 쥔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엄마는 글을 쓰고 싶었어. 그런데 막상 살면서 얼마나 노력했나 돌이켜보면… 글쎄, 정말 내가 원한 게 맞았나 싶기도 하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슬픔이 묻어났다.


며칠 뒤, 나는 어머니의 낡은 책장을 정리하다 바로 그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첫 장을 넘겼다. 그 속에서 어머니는 꿈을 포기한 게 아니라 잠시 미뤄두고 있었다.


‘비 오는 날엔 흙냄새가 난다. 현우는 그 냄새가 좋다고 했다.’ ‘오늘 현우가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다. 세상의 모든 시어(詩語)를 합쳐도 이보다 아름다운 단어는 없겠지.’


그 문장들을 읽는 순간, 내 마음속에 작가라는 꿈은 단순한 동경을 넘어선 필연이 되었다. 흩어져 있던 재능의 조각들이 마침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잃어버린 꿈이자, 내가 완수해야 할 소명이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나는 문예창작과를 목표로 잡았다. 1학년 때, 유명 문예 공모전에 단편 소설을 제출했다. 결과는 낙선이었지만, 심사위원의 짧은 평이 뇌리에 박혔다.


'재능은 보이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인물을 분석하고 서사를 구성하는 능력은 탁월하나, 짧은 시간 내에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는 부족하다.'


이 평은 내게 명확한 길을 제시했다. 나의 오만한 자의식은 이 문장을 '핵심 역량은 뛰어나나, 부차적인 기술이 부족하다'라고 해석했다.


나는 정해진 시간 안에 심사위원의 주관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실기 시험의 불확실성을 견딜 수 없었다. 입시는 통제 가능한 변수들의 싸움이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강점인 '분석'과 '구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 즉 오직 정답만이 존재하는 시험 점수로 승부하는 '정시'를 택했다.


3년의 지겨운 입시생활 끝에, 꿈꾸던 대학에 정시로 입학했다. 하지만 합격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능을 보고 2주 정도 지났을 무렵, 평소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의 빈자리, 나는 어머니와 동생을 아버지의 몫까지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작가라는 목표는 이제 생계라는 현실과 맞닿아 더욱 각박해졌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택한 것은 학원 국어 강사였다. 그러나 그 선택은 예상치 못하게 나의 작가적 역량을 키웠다. 매일 수십 명의 학생 앞에서 복잡한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은, 곧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훈련'과 다름없었다. 나는 그 직사각형 교실에서, 작가로서의 또 다른 현장을 배우고 있었다.


작업과 수업, 생계와 꿈. 그렇게 나의 20대가 막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 그 막의 마지막 장을 쓰기 위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날 밤, 자경은 잠들 수 없었다.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닫힌 아들의 방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들은 괜찮다고, 응원해달라고 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괜찮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강하고 단단하기만 했던 첫째 아들. 남편을 잃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그녀는 현우에게 알게 모르게 기둥의 역할을 기대했다. 현우는 단 한 번도 그 기대를, 그 무거운 짐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자경은 소리 나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의 방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틈새로 옅은 스탠드 불빛과 함께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든 아들은, 아주 오랜만에 어렸을 적의 무방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문틈으로 아들의 낡은 책상을 바라보았다. 책장 가득 꽂힌 책들, 손때 묻은 만년필, 대학 시절 받은 낡은 상패. 그 모든 것이 아들의 치열했던 시간을 증명했다.


그녀는 아들의 성공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 성공을 위해 아들이 무엇을 홀로 견뎌왔는지를. 얼마나 많은 밤을 외롭게 지새웠을지를. 아들의 시간에 꼼꼼히 이름표를 붙여주던 자신은, 정작 그 시간의 무게를 한 번도 제대로 헤아려주지 못했다.


그녀는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닫힌 문 너머로, 아들의 마지막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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