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시작이라 부르는 것은 종종 끝이며, 끝맺음은 곧 시작을 만든다.”
-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Thomas Stearns Eliot)
2025년 3월 10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는 모교 교정을 유령처럼 천천히 거닐었다. 늦겨울의 스산함이 걷힌 자리에 옅은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더위에 취약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겨울의 차가움을 간직한 공기 속에서 새 생명이 싹트는 계절이었다.
몇 년 만에 찾은 캠퍼스는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낡은 중앙 도서관 앞 벤치,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학생들, 바람에 나부끼는 동아리 홍보 현수막. 모든 풍경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이곳에서 내 20대가 시작되었고 뜨겁게 타올랐으며, 또 다른 이들의 청춘이 저마다의 빛으로 산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서른인데, 내게 캠퍼스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구나.'
나는 낡은 건물들 사이를 걷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가장 오래된 인문대 건물. 문예창작과 과방이 있었던 곳이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이곳을 작업실 삼아 수없이 밤을 새웠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윤을 처음 만났다. 그날은 햇살만큼이나 눈부셨고,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하고 동시에 가장 아린 시작이었다.
2015년, 3월의 캠퍼스.
강당은 신입생들의 들뜬 웅성거림과 먼지 쌓인 나무 의자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빨리 이 지루한 의식이 끝나고 글을 쓰고 싶다.' 내 관심사는 오직 종이 위의 새로운 세계, 그뿐이었다.
단상에 한 여학생이 올랐다. 내 시선이 그녀에게 못 박혔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 지적이고 차분한 분위기. 그녀는 능숙하게 마이크를 잡고 또렷한 목소리로 신입생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과하지 않은 여유, 시선을 사로잡는 당당한 태도. 그 유려한 말솜씨가 내 무심했던 세계에 균열을 냈다. 저 자신감을 향한 동경과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는 서늘한 질투가 뒤섞여 낯선 떨림으로 번졌다.
'안녕하십니까. …과 과대표 2학년 채하윤입니다.'
채하윤. 하윤. 무슨 과인지는 듣지도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되뇔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명회가 끝나고 강당을 빠져나오는데, 나는 저도 모르게 하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맑게 웃고 있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단상 위에서 보던 차가운 이성과는 또 다른, 예상치 못한 매력이었다. 말을 걸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하윤이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건물 로비로 들어섰다. 마지막 기회였다.
뻣뻣하게 굳은 몸만큼이나 목소리도 어색하게 튀어나왔다. "저… 저기요!"
하윤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큰 눈망울이 나를 응시하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네? 저 부르셨어요?"
다정한 목소리에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갈 곳 잃은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 그… 방금… 단상에서… 이야기… 잘… 하셔서…."
엉망이었다.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만들지 못했다. 하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 입학 설명회 말인가요? 제가 학생회라서요." 그녀는 내 어설픈 말에도 귀 기울여 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혹시… 문예창작과세요?"
"네, 맞는데. 혹시 신입생이신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은 온통 '다행이다'라는 생각뿐이었다.
"아, 그럼 제 후배네요! 반갑습니다."
그녀의 친절함에 조금 안도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붉었다. 그녀는 마시던 물병을 내게 건네며 숨을 돌리라고 손짓했다. 차가운 플라스틱 병의 감촉이 손바닥에 선명했다. 내가 물을 크게 한 모금 들이키다 사레가 들려 뿜고서야, 어색했던 공기가 터지고 우리의 첫 대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나를 꾸밈없이 드러냈다. 학원에서 수능 국어를 가르친다는 사실, 밤낮없이 글을 쓰는 열정, 그리고 '성공'에 대한 강박적인 갈망까지. 하윤은 내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그녀는 빛나는 내 눈을 보며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 끝에는 옅은 불안감이 스쳤다. 저 불꽃이 세상을 밝힐 수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것을 태워버릴 수도 있음을 그녀는 아는 듯했다.
"대화가 너무 재밌어서 더 얘기하고 싶은데, 제가 이제 수업에 가봐야 해서요… 혹시 연락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건넸다.
"크큭. 잠금도 안 풀려있어요. 자, 여기 제 핸드폰에 현우 씨 번호 찍어줘요."
오히려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며 하윤이 웃었다.
나는 간신히 번호를 치고 돌려주며 물었다. "010-xxxx-xxxx 맞나요? 너무 떨면서 써서…."
"크크크. 맞아요. 걱정 말고 빨리 가봐요. 학원 늦겠어요."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더 지체할 수 없어 가방을 챙겨 뛰기 시작했다. 학원으로 가는 버스에서 나는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바보, 멍청이. 내 번호만 주고 선배 번호를 안 받았네.'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오매불망 핸드폰만 째려보던 며칠 뒤, 다행히 하윤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현우 씨,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제가 조언이랄까, 도움을 구할 게 있는데…."
그 연락이 우리 '썸'의 시작이었다.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급하게 약속을 잡았다.
"오늘 수업 끝나고 학교로 가면 10시 47분쯤 도착할 것 같은데, 그때 괜찮으세요?"
"네. 그럼…."
하윤이 채 답하기도 전에, "저 수업 들어가 봐야 해서, 이따 뵐게요. 꼭 봐요." 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쿵쾅대는 가슴을 쥐어잡고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무슨 전화를 그렇게 끊어요?? ㅡㅡ; 어디서 볼지는 정해야지ㅋㅋㅋㅋ 인문대 2층 과방으로 와요. 내가 선배고 두 살 누나니까 한번 봐준다~~’
잽싸게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라 잠시 눈을 붙였다 뗀 순간, 시간은 11시 13분이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2통과 메시지 1통.
‘뭐지, 나 오늘 바람맞은 거예요? 무슨 일 있는 거에요? 전화도 안 받고…’
화가 났다기보다는 걱정하는 말투. 나는 무음 모드 습관을 탓하며 창문에 머리를 찧고는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 죄송해요. 버스에서 졸아서 정류장을 놓쳤어요. 지금 바로 가면 20분이면 될 것 같아요. 빨리 갈게요."
"크큭. 진짜 예측이 안 되네. 아까 10시 47분이라고 하는 것부터. 괜찮아요, 저 지금 과방에서 과제하고 있어요. 어차피 할 일도 있고, 대신 늦었으니까 나 데려다주면서 얘기해요."
헐레벌떡 언덕을 뛰어 인문대 건물에 도착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칼날처럼 폐부를 찔렀다. 폐가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땀을 뻘뻘 흘리는 나를 보고, 기다리던 하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어차피 늦은 걸 뭘 또 그렇게 뛰셨어요." 그녀는 손에 든 책으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래도 다르죠. 노력이 가상하니까, 좀 더 봐주고 싶고…."
땀을 닦아낼 생각도 못 하고 숨을 고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하윤이 손에 든 책으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시원한 바람에 현우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참나. 말은 잘해요. 진짜 스무 살 맞아요? 영락없는 오빠 같은데?"
"오빠요? 그래도 우리 두 살이나 차이 나요."
"누가 뭐래요? 암튼 왔으니까 됐어요. 이제 나 데려다줘요."
하윤이 가방을 챙겨들며 앞장섰다. 현우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집이 어딘데요?"
"왜요? 어디면 어쩌고 저기면 어쩔 건데요?"
하윤이 가방을 챙겨들며 앞장섰다. 현우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그러니까 너무 멀면 버스 타고, 가까우면 걸으려고요." 막차가 끊길까 마음이 급한 현우였다.
"그런 표정이 아닌데. 배 아픈 강아지 마냥 식은땀 흘리고 있구만."
하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가 현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짚었다.
"그래서 어딘데요. 저 막차 끊기기 전에 데려다주게."
"걸어서 30분. 지금 가면 막차 타겠는데? 실랑이할 시간에 출발하죠."
하윤이 현우의 팔을 잡아끌자, 부끄러운 현우가 슥 팔을 뺐다.
"아니, 아직 스킨십은 좀…."
"뭐 나는 만지고 싶어서 만지나. 하여튼 별나네."
하윤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팔을 놓고 앞장섰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둘의 발소리만이 조용한 교정에 울렸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주면 되는데요?"
"아, 맞다. 글 쓰는 거 좋아한다면서요. 영화 각본 같은 데는 관심 없어요? 제가 영상 동아리를 하는데 작가가 부족해요. 그쪽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글을 써줄 것 같아서요."
"…선배랑 저랑, 둘이요?"
"그건 후배님 편하신 대로 제가 다 맞춰줄게요."
"무조건 둘이요." 내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다른 사람 끼면 저 작업 절대 안 합니다."
내 강렬한 눈빛에 하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흥미롭다는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작업할지 논의하죠."
가로등 켜진 교정을 나란히 걸었다.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알기에 둘은 잠시 침묵했다. 침묵을 깰 즈음에는 이미 하윤의 집 앞이었다.
"우선 작업은 같이 하기로 하고, 시간은 차츰 맞춰봐요. 학원 끝나고 잠깐이라도 보든지, 낮에 학교 수업 끝나고 학원 가기 전까지 최대한 같이 쓰고요. 어때요?"
"알겠어요. 생각해볼게요."
"뭐 그렇게 생각이 많아. 하고 싶으면 그냥 해보는 거지."
하윤이 웃으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빨리 뛰어요. 저기 버스 온다. 집이 어디에요?"
"의정부요. 빨리 가봐야겠네요. 내일 봐요!"
나는 정말 내일 봤으면 하는 기대를 담아 달리기 시작했다.
겨우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영화 시나리오라. 선배랑. 재밌겠는데.'
"아들, 늦게 들어왔으면 빨리 자자. 내일 학교 안 가니?" 귀신같이 듣고 방문을 여는 어머니였다.
"네, 자려고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 모르겠다. 내일 생각하자.'
그러나 다음 날부터 하윤은 나에게 전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나를 찾아 점심을 먹이고 과방으로 끌고 갔다.
그날부터 우리의 일상은 정교하게 짜인 시계태엽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오후 1시, 우리는 인문대 2층 과방에 모여 '스무 살, 첫 짝사랑'이라는 가제의 청춘 연애물을 구상했다. 나는 뼈대를 세우고, 그녀는 그 위에 온기를 입혔다. 한번은 내가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만 건조한 이별 장면을 써 간 적이 있었다. 하윤은 한참 동안 그 장면을 들여다보더니, 펜으로 딱 한 문장을 추가했다.
‘너는 내게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헤어지는 거야.’
그 문장 하나가 차가운 논리 위에 뜨거운 심장을 올려놓았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내 단단한 세계에 그녀는 그렇게 예상치 못한 균열을 만들었다. 반대로 하윤이 쓴 아름답지만 산만한 고백 장면을, 나는 날카롭게 재구성하여 보는 이의 심장을 죄는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희열을 느꼈다.
오후 6시, 내가 학원으로 출근하면 하윤은 과방에 남아 작업을 이었고, 밤 10시가 넘어 내가 돌아오면 둘은 다시 머리를 맞댔다. 새벽 1시 30분. 모든 작업을 마치면 나는 하윤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막차가 끊겨 택시를 타는 날이 잦았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충만했다. 어쩌면 내가 쓰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 그 예감이 어떤 피로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되고 가을이 되자, 우리는 작품의 실제 구현에 나섰다. 촬영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12월에 시작되었다. 2016년 1월, 모든 촬영이 끝났다. 하지만 결과물은 우리가 꿈꾸던 '대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아리 내부 시사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강당은 뜨거운 박수 대신 미지근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스크린의 불빛이 꺼지고 환한 형광등이 켜지자, 사람들의 어색한 표정이 드러났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가 침묵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우리가 10개월 이상 매달린 결과라고?'
노력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결과물의 비극' 앞에서, 내 신념은 산산조각 났다. 시사회가 끝나고 텅 빈 강당에 남은 것은 우리 둘뿐이었다. 하윤이 굳은 얼굴로 내 등을 두드렸다.
"현우야, 괜찮아. 결과가 전부는 아니잖아. 우리 진짜 열심히 했고, 나는 그 시간들이 좋았어."
하지만 그녀의 위로는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과정이 뭐가 중요해? 결과가 이 모양인데. 이건 실패야. 누난 지금 이게 괜찮아?"
내 목소리에는 실망을 넘어선 경멸이 담겨 있었다. 하윤은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우리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군 입대 영장을 받았다. 이 모든 좌절감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했다. 하윤에게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그래. 잘 다녀와."라고 차분하게 말했다.
며칠 뒤, 그녀 역시 교환 학생으로 해외에 떠날 계획을 밝혔다.
2015년 한 해를 끈끈하게 함께했던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다음 페이지를 준비하며, 잠시 서로의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