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2025년 3월 26일

by msg


"시간은 환상이다. 점심시간은 두 배로 그렇다."
"Time is an illusion. Lunchtime doubly so."
- 더글러스 애덤스 (Douglas Adams)



2025년 3월 26일.


정기 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은 아침, 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기실 의자에 몸을 묻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나운서가 날씨 소식을 전했지만, 그의 귀에는 소독약 냄새와 뒤섞인 잡음으로만 들렸다.


“강현우 씨, 들어오세요.”


진료실 문을 열자, 암을 진단받은 그날의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의사는 그의 차트를 확인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현우 씨, 혹시 통증은 없으십니까? 진통제를 복용하고 계신가요?”


“아니요. 가끔 명치께가 좀 불편한 정도입니다. 심한 통증은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의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의 CT 영상을 가리켰다. 회색빛 장기 사이, 췌장 미부의 어두운 덩어리가 선명했다.


“췌장암 4기인데 통증이 거의 없다는 게 좀 이례적입니다. 암의 위치가 통증 신경을 직접 압박하지 않거나, 환자분의 통증 역치가 높은 경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증이 없다고 병의 진행이 더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퍼져 나가는 경우가 더 위험합니다.”


의사의 말을 들으며 현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봄 햇살이 한껏 퍼져 있었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부모,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 그들을 보던 현우는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2017년 가을, 하윤과 함께 갔던 첫 데이트. 그는 충동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 악몽 같던 날 이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놀이공원으로.


놀이공원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그는 매표소를 지나 자이로드롭 앞에 섰다. 안전바가 '찰칵' 잠기는 소리와 함께, 주변은 비명으로 채워졌다. 수십 미터 높이의 기구가 하늘 끝에 멈췄다.


'예전에는 이게 뭐라고 이 스릴을 그렇게 즐겼을까.'


기구가 곤두박질칠 때 눈을 떴지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스릴은 없었다. '이러다 안전벨트가 풀리면 병보다 허무하게 죽겠구나' 하는 기묘한 계산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당이 떨어져 어렸을 땐 먹지도 않던 츄러스를 씹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쓴맛 앞에서, 인간은 결국 사소한 단맛에 기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달콤함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꼭 먹어둬야 할 것만 같았다. 당을 충전하고 나니 놀이공원에 온 본래 목적이 떠올랐다. 2017년 가을,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가 글감을 잡는 것.


2017년 가을, 놀이공원.


현우와 하윤은 연인이 된 후 첫 주말 데이트로 그곳을 찾았다. 하윤은 긴 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라 시차 적응이 덜 됐고, 몸도 쇠한 상태였다. 현우는 걱정했지만, 하윤은 "데이트인데 당연히 가야지!"라며 들떠 있었다.


몇몇 놀이기구를 타고 웃고 떠들던 그때, 주변의 즐거운 소음이 갑자기 멀어졌다. 길을 걷던 하윤이 비틀거리더니 현우의 어깨에 기댔다. "현우야… 나 좀 어지러워…."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순간 현우의 숨이 멎었다. 그는 즉시 하윤을 부축해 근처 벤치에 앉혔다. 차가운 금속 난간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윤아! 괜찮아? 어디 아파? 병원 가자."


하윤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더 현우에게 기댔고, 결국 그의 품에 쓰러졌다. 그녀의 무릎이 꺾이는 순간 온 세상이 느려졌다. 현우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몸이었다. 그는 응급실 위치를 물으며 미친 듯이 뛰었다.


다행히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기력이 많이 쇠하신 것 같네요. 긴 여행에 피로가 누적된 데다, 식사를 거르거나 당분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하윤은 링거를 맞으며 잠이 들었다. 현우는 잠든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는 잠든 하윤을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옮긴 뒤, 그녀의 핸드폰을 열어 부모님께 연락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올 그녀 부모님의 놀란 목소리를 예상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서 달려오신 부모님께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병실 침대 옆자리를 당연하다는 듯 내어드린 채, 현우는 차가운 병원 로비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하윤은 멀쩡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하윤의 어머니는 당분간 집 밖에 나갈 생각도 말라며 딸을 데려갔다. 12월이 되어서야 몸을 회복한 하윤은, 부모님과 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 독립을 선포했다.


“네 몸 하나 제대로 못 챙기면서 무슨 자취야!”


“엄마, 저 이제 스물셋이에요. 저도 알아서 잘 살 수 있어요.”


거실은 울음과 고성으로 가득 찼다. 결국 하윤은 집을 뛰쳐나와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 너머

로 눈물 섞인 웃음이 들렸다. “나 결국 집 나온다. 옆에서 도와줄 거지?”


그날 이후 하윤은 자취를 시작했고, 현우의 헌신은 더욱 맹렬해졌다. 학원 수업이 끝난 늦은 밤, 그는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면서도 핸드폰으로는 유기농 마켓의 신선 재료를 주문했다. 본인 입에 들어가는 건 삼각형 김밥이었지만, 하윤의 냉장고는 그가 고른 가장 좋은 식재료들로 채워져야 했다.


그녀가 잠든 시간, 현우는 하윤의 작은 부엌을 차지하고 익숙하게 칼질을 시작했다. 도마 위에서 채소가 규칙적으로 썰리는 소리, 냄비에서 뭉근하게 끓는 찌개 냄새. 그것이 그가 사랑을 표현하고, 관계의 불확실성을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2018년 여름.


어느 날 둘은 산책을 하며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현우가 잡고 있던 손을 살짝 꽉 쥐며 물었다. “이제 학교도 한 학기 남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글쎄. 너랑 글도 쓰고 싶고… 적당한 기업에 들어가서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


“그럼 취업하고 나랑 글을 쓴다는 거야?” 현우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차갑게 식었다.


“응? 응.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우리 꿈이잖아?” 날 선 질문에 하윤이 놀란 듯 되물었다.


“취업하면 예전처럼 글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잖아.”


“내 인생이야. 나는 불안 속에서 글 쓰고 싶지 않아. 겁 많은 나한텐 그런 안정이 꼭 필요해.”


“그럼 돈이 안 되면 우리 꿈은 아무것도 아니야?” 현우는 배신감에 언성을 높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그게 내 꿈을 지키는 방식이야. 나도, 내 자식도 꿈 때문에 궁상맞고 싶지는 않아.” 하윤의 태도는 단호했다.


현우는 한숨을 쉬고 물었다. “좋아. 대신 안정된 삶을 얻으면, 꼭 나랑 우리 이야기를 같이 쓰기로 약속해줘.”


“그게 부탁할 일이야? 나도 그 꿈은 계속 가지고 있어. 이 바보야. 넌 정말 날 몰라도 너무 몰라.”

하윤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현우는 어지러운 생각들로 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돌아온 그가 마주한 것은 걱정이 담긴 하윤의 메시지였다.


'…네가 어떤 부분에서 심란한지 알아. 우리 다음 주쯤 날 잡고 다시 얘기하자. 내가 생각을 좀 정리할 시간을 줘.'


그때 한숨 소리를 들은 동생 현수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현수는 특유의 명쾌함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뭐 별일 아니네. 누나는 설명하겠다고 했고, 시간까지 달라고 했잖아. 그럼 그때 얘기하면 되지.”


“그걸 정리하는데 왜 다음 주까지 시간이 걸리냐고.” 현우가 투덜거렸다.


“아이고 형님. 모든 사람이 당신 같지가 않아요. 형의 그 논리적으로 사람 몰아붙이는 버릇 때문에 누나가 시간을 달라고 한 거잖아. 막말로 누나가 정리 안 하고 얘기하다 틈이라도 보이면, 형이 가만히 들어주겠어? 그거 물고 늘어져서 사람 피 말릴 거 아니야?”


현수의 속사포 같은 말에 현우는 할 말을 잃었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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