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2025년 4월 9일

by msg


"시간의 발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 프리드리히 실러 (Friedrich Schiller)



2025년 4월 9일


은은한 묵향이 감도는 한정식집의 고즈넉한 룸 안, 현우는 박진태 대표, 이준영 감독과 마주 앉았다.


지난 화상 회의 이후, 그들의 눈빛에는 당혹감 대신 현우의 이야기에 대한 묘한 기대감과 진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강 작가님, 지난주 얘기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박진태 대표가 놋잔에 맑은 술을 채우며 먼저 운을 뗐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풀어놓으시는 이야기가 실제 경험에 바탕을 뒀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가 사실인지요?"


현우는 예상했던 질문에 살짝 미소 지었다. "거의 대부분은 제 경험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물론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 각색된 부분도 있지만, 인물의 감정선이나 사건의 핵심은 제 삶과 거의 동일합니다."


이준영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 작가님 작품의 톤이 바뀐 점에 대해서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절반 정도 나온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다들 호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박 대표가 잔에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강 작가님처럼 젊고 재능 있는 작가가, 그것도 빽 없이 이 바닥에서 자신의 색깔을 찾는 것이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작가님의 이야기가 더 남다르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카뻘 나이의 젊은이가 말기 암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을 의지를 보이는데, 어른으로서 응원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세 사람은 그날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더욱 가까워졌다.


박 대표는 술잔을 기울이다 문득 이 감독을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 작가님 이야기에는 왜 친구 이야기는 없는지 궁금하네. 주변 인물들이 온통 가족 아니면 연인뿐이야. 작가 생활하느라 바빴던 건 알지만, 대학 시절 친구 한 명쯤은 있지 않나?"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의 한 점에 머물렀다. 박 대표의 질문은 잊고 있던 기억의 수면 위로 작은 돌멩이를 던졌다. "친구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삶의 궤적에서, 친구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명뿐입니다."


그의 머릿속에 오래전 기억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윤, 그리고 대학 동기 윤민과 셋이서 술잔을 기울이던, 아직은 모든 것이 가능했던 그 밤.


2019년 4월, 학교 앞 작은 술집.


하윤의 취업턱 자리였다. "누나, 하윤 누나!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입사턱인데 왜 우리 둘만 불러! 둘이서 나 염장지르는 것도 아니고. 강현우 이 자식 눈은 뭐야, 왜 이래? 아주 꿀이 떨어지네!" 윤민은 과장된 투덜거림으로 두 사람을 향한 부러움과 애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하윤은 깔깔 웃으며 윤민의 어깨를 툭 쳤다. "야, 윤민아. 네가 바빠서 그렇지! 이건 특별대우 같은 거야."


"아, 알겠어! 알겠다고! 그 대신 둘이 좀 떨어져 봐!" 윤민은 현우와 하윤의 손을 보며 혀를 찼다. "근데 진짜 너네 둘은 맨날 과방에서 각자 글 쓰고 공부하는 게 데이트야?"


현우는 윤민의 말에 괜히 머쓱해져 하윤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하윤이 다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야, 내가 좋으면 됐지! 공모전 준비하려면 그 시간도 부족해. 그리고 너네라니, 말이 좀 짧다."


“죄송합니다. 울화가 치밀어서 그만…”


취기가 오르자 윤민이 물었다. "다 알겠는데, 요즘 누나는 왜 글을 안 써? 원래 둘이 딱 붙어서 글 쓰던 거 아니야?"


하윤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냥. 취미 정도라는 생각이 들어서. 업으로 삼으면 재미없을 것 같아."


"그럼 얘랑 글 쓰는 것도 이제 안 해?" 아쉬운 표정으로 윤민이 물었다.


"얘랑은 글 써야지. 그게 제일 재밌어서 얘 만나는데." 하윤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현우가 윤민을 째려봤다. "그러는 너는 글 안 쓰냐? 여기서 유일한 실기 합격잔데 안 아까워?"


"쓸 거야, 쓸 건데 나는 온전히 내 글 쓰는 건 못하겠고 남의 글 다듬는 게 더 재밌어." 그가 손깍지를 끼고 몸을 뒤로 젖혔다. "뭐, 너 성공하면 네 밑에서 보조 작가나 할란다. 그게 내 커리어 플랜이야."


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뭐래. 근데 진심이야?"


"돈만 많이 주면 무조건 하지. 직장 상사 이겨 먹을 수 있는 직장이 흔하지는 않으니까."


현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됐고, 진짜로 뭐하고 살 거야?"


"아마, 출판사에 가고 싶어."


"아마 가고 싶은 건 뭐야?" 옆에서 조용히 듣던 하윤이 항상 똑부러지던 윤민의 의외의 대답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까 말했잖아. 내 글 쓰는 것보다 남의 글 다듬는 게 좋다고. 되면 어디 괜찮은 출판사 들어가서 편집자로 일할 거야." 그날 대화 중에 윤민이 가장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마디를 뱉었다. "왜?" 그 한마디에는 가장 친한 친구가 왜 자신의 꿈을 남의 꿈에 편승하는 것으로 정했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뜻을 안 윤민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다 너같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 수는 없어. 각자 잘하는 게 있는 거지.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다 하는 것보다 수정에 재능이 있더라고."


"아무튼 어떻게든 계속 글은 써라. 그래야 내가 보조로라도 쓰지." 현우가 마지막 남은 잔을 비웠다.


"네네, 그러시겠죠." 윤민도 잔을 비우고 강냉이 몇 개를 현우 이마에 던졌다.


술자리가 파하고, 셋은 아직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나섰다. 취기가 올라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윤민이 비틀거리며 현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강현우!"


씩씩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귀염상의 여자가 보였다. 중학교 동창 나희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횡단보도를 건너와 현우의 등을 툭 쳤다.


"야, 조나희 너 여기서 뭐해? 완전 오랜만이다!"


“근처에서 약속 있어서. 좀 늦어서 빨리 가봐야 해.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내가 연락할게. 나중에 봐!” 하고 그녀는 총총총 뛰어갔다.


그 순간, 현우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윤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는 현우의 팔을 붙잡고 아이처럼 흔들었다. "야, 누구야? 완전 내 스타일인데? 소개시켜줘, 제발."


"…작가님? 작가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박 대표가 현우의 팔을 툭툭 치는 감각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과거 윤민이 팔을 흔들던 감각이, 현실에서 박 대표가 어깨를 흔드는 감각과 겹쳐졌다. "아, 아닙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살다 보면 다 그렇게 돼요. 경조사만 챙기면서 사는 거지." 박 대표가 씁쓸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걸 알아서 더 챙겼어야 하는 건데 참 후회가 됩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급히 할 일이 생각나서요."


그는 빠르게 겉옷을 챙겨 자리를 빠져나왔다. 자신의 삶에서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공백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재로 향했다. ‘마지막 대본’ 폴더 안에 새로운 파일을 열고, 두 친구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2019년 4월,


마지못해 주선한 소개팅. 계획적인 나희는 약속 10분 전에 도착해 메뉴판을 정독했고, 즉흥적인 윤민은 2분을 넘겨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버스가 놓쳐서…."


"괜찮아요. 5분까지는 봐주려고 했어요." 나희의 뼈 있는 농담에 둘은 첫 만남부터 삐걱거렸다.


그녀가 윤민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몇 번의 만남이 더 이어진 후였다.


한번은 나희가 앞머리를 미세하게 다듬은 날이었다.


동료들조차 알아채지 못한 변화를, 윤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콕 찝어 알아차렸다. "어, 앞머리 잘랐네요? 지금이 훨씬 잘 어울려요."


결정적인 순간은 어느 가을밤이었다. 야근 후 지쳐 있던 나희에게, 그는 묻지도 위로하지도 않고 자판기에서 뽑은 따뜻한 율무차 한 잔을 건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의 휴대폰에 도착한 메시지.


첨부 파일: HR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절차.pdf, 정신과 상담 지원 연계 병원.xlsx


내용: 말 대신 폼이요. 말로 하는 위로는 재주 없다고 했죠. 이게 내 방식입니다. 오늘도 화이팅. 아! 혹시 상담은 부담스러운데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 잘 들어줄 수는 있으니까.


나희는 한참 동안 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화면 위로 뜨거운 것이 툭, 떨어졌다. 그의 장난기 속에 숨겨진 진심, 서툴지만 가장 현실적인 형태의 돌봄. 그녀는 그날, 윤민에게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


몇 해가 지나 그들은 결혼했고, 현우는 그들의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갓 구운 빵 냄새가 나는 아담한 집, 서로를 바라보는 익숙하고 편안한 눈빛. 그는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이 갖지 못했던 종류의 행복을 보았다.


노트북을 덮자, 방 안에 고요함이 내렸다. 그는 두 친구의 모습 위로, 자신과 하윤의 시간을 겹쳐보았다. 윤민은 나희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곁에서,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묵묵히 건넸다. 그것은 현우가 하윤에게 주려 했던 '완벽한 해결책'과는 결이 다른, 상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방식의 돌봄이었다.


'나는 어땠는가.' 그 평범함 속에 담긴 행복의 무게를, 왜 그때는 알지 못했을까.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얘는 왜 전화를 안 받아.’ 그는 곧장 문자를 보냈다.


‘너 언제 시간 되냐? 얼굴 한번 보자. 메시지 보면 전화 줘.’


한창 책을 읽다가 한잠자고 일어나 폰을 보니 윤민에게 부재중 전화와 함께 문자가 와 있었다.


‘얘는 지가 전화하라고 하고 연락을 안 받는 게 아주 습관이야, 습관. 회의 중이었어. 너 될 때 전화해. 그리고 이제 일도 하는 놈이 무음 좀 해 놓지 마라. 돈도 많으면서 워치라도 하나 사든지.’


현우는 휴대폰 화면 상단의 무음 아이콘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괴감에서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남들은 그렇게 바꾸려 들면서, 정작 자신은 10년 넘게 지적받은 사소한 습관 하나 고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무지함에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웃음 끝에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한 조각을 쓸어 담고, 심호흡을 한 뒤 윤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오, 너 앞으로 먼저 전화해놓고 안 받을 거면 전화하지 마! 거절 메시지도 확인 안 하고 지 할 말만 띡 보내 놓는 놈이 어딨어?" 단단히 뿔이 난 윤민이었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그 전화로 할 얘기는 아니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 얼굴 한번 보자. 다음 주에 시간 되는 날 있냐? 내가 맛있는 아주 비싼 밥 살게."


생전 처음 듣는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에 놀란 윤민은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걸었다.


"너 현우 맞지? 어디 아프니? 왜 네가 비싼 밥을 사?"


"…그냥 좀 보자고. 중요한 얘기야."


"그럼 나 다음 주 화요일에 프로젝트 마무리되고 좀 일찍 퇴근할 것 같은데 그때 보자. 5시까지 우리 회사 앞으로 와라. 너 길치잖아. 만나서 같이 가자."


"알겠어. 그럼 4월 15일 너네 회사 앞에서 5시에 보는 걸로. 메뉴는 숙성회다. 너 회 좋아하잖아. 점심 굶어." 길치인 걸 기억해주는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에 목소리가 들떴다.


"와, 너 나 모르는 새에 또 히트작 하나 나왔냐? 웬일이래 강크루지 영감이."


"아마 나올지도…." 현우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그날 늦지 마라."


일주일 뒤, 약속한 가게에서 윤민은 내년이면 아빠가 된다고 했다. 현우는 친구의 미래에 축하를 건네면서도, 자신에게는 없는 미래라는 사실에 쓴웃음을 삼켰다.


"나는 요즘 영화 시나리오 쓰고 있어. 이제 반 좀 넘게 썼다."


"오, 그럼 거기 나도 나오냐?" 윤민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활력이 넘쳤다.


"당연하지. 이제 슬슬 네가 많이 나올 타이밍까지 스토리가 전개됐다."


"흥미롭네. 그거 말고 따로 할 말이 있어서 보자고 한 거 아니야?"


"…아직 가족들이랑 이번 프로젝트 사람들한테만 얘기했는데, 너한테는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뜨거운 매운탕 김이 훅 끼쳐서인지, 땀이 흘러 현우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의무감으로 말했지만, 친구에게는 단단히 잡아왔던 마음을 놓고 기대고 싶었다.


"뭔데 이렇게 뜸을 들여. 너답지 않게?" 윤민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한참의 침묵 끝에, 울음이 터져 나오기 직전의 목소리로 현우가 말했다. "나 병에 걸렸어. 췌장암이래."


"…뭐?" 윤민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췌장암 4기. 말기암이야. 1년 정도 남았다고 했는데, 이제는…."


현우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방울이 빠르게 흘러내렸다.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해 손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떨궈도 온몸이 떨렸다. 윤민은 말없이 현우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역시 눈가가 붉어졌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키고 친구를 조심히,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윤민의 위로를 들은 현우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그…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한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래?"


"어… 그래, 뭔데? 얘기해봐. 뭔들 못 들어주겠냐. 다 들어줄게."


현우는 윤민의 어깨를 잡아끌어 귓속말로 마지막 부탁을 속삭였다.


"..................."


윤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현우를 안심시켰다.


“나희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자. 괜히 임산부가 영향 받으면 안 되니까.”


“알겠어.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창밖 가로등이 인도에 두 사람의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현재가 지나간 자리에 과거가 눕고, 그 둘을 미래가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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