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2025년 4월 30일

by msg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 앙드레 말로 (André Malraux)



2025년 4월 30일.


약속된 주간 보고 시간이었다. 현우는 박진태 대표와 이준영 감독과 마주 앉았다. 화상회의가 아닌 대면 만남이었기에,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 작가님, 이번 원고는 정말… 숨 막힐 정도로 긴장되더군요. 젊은 시절 부끄러운 제 모습을 거울로 보는 느낌이랄까요?"


이 감독은 날카로운 눈으로 원고를 훑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뒤흔들 만한, 더 큰 사건이 있었습니까?"


현우는 예상했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숨을 고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가 풀어놓을 이야기는, 그의 인생 항로를 통째로 바꿔버린 거대한 폭풍의 기억이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시작은, 하윤의 내면에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2020년 5월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안정적인 수입과 번듯한 명함만 손에 쥐면 모든 불안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정작 그토록 원하던 안정을 얻고 나니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공허함에 휩싸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인사팀. 그 번듯한 타이틀 뒤에 숨은 나는, 사실 빌린 옷을 입고 있는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나는 차라리 현우처럼, 어딘가 삐죽 튀어나온 뾰족한 다각형의 사람이 부러웠다. 그 날카로운 모서리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들이받으며 만들어낸 상처이자 훈장이었으니까. '인생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고, 그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내던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


정말 살아있음을 느꼈던 순간은, 현우와 함께 밤을 새우며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뿐이었다. 나는 그의 맹목적인 열정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 열정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길을 잃었다.


2020년 7월 20일


나는 평소 회를 좋아하는 현우를 위해 오마카세를 예약했다. 그에게 내 가장 깊은 질문을 던지기 위한, 나름의 무대 장치였다. 조용한 공간에 셰프의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만이 경쾌하게 울렸다. 식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자기는… 어쩌다가 작가가 되고 싶어졌어?"


현우는 어머니의 낡은 일기장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모든 자신감과 치열함이, 실은 한 사람을 향한 지독한 사랑과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현우와 나의 근본적인 차이를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인생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가는 사람이었다. 반면 나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답지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계획은 뭔데?"


"당신이랑 글 쓰면서 언젠가 고전이 될 작품 하나 남기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거."


그의 계획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그 계획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때, 현우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그가 구독하던 문예지의 웹진 알림이었다.


"어디 봐봐."


현우는 별생각 없이 화면을 넘기다, 어느 순간 손가락을 멈췄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모든 색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화면에는 모 문예지의 당선작 목록이 떠 있었다.


단편소설 부문 당선, 김지환 교수.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작품 제목은, 몇 달 전 현우가 피드백을 받기 위해 교수에게 제출했던 자신의 소설 제목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이게…."


현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현우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아무것도 아니야. 마저 먹자."


차라리 소리치고 분노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의 침착함은 체념이었고, 그 체념이 내 심장을 더 아프게 찔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서도 현우는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이 폭풍 전의 고요임을 직감했다.


"그냥 넘어갈 생각이야?"


"그럼 어떡해. 데뷔도 못한 내가 김 교수를 상대로 싸우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나는 이 바닥에서 영원히 매장될 거고."


"그래서, 네 작품을 갈취한 사람을 가만히 두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겠다고? 그게 네가 말하던 성공이야?"


"이건 정의의 문제가 아니야. 타이밍의 문제야. 성공해서 힘을 가진 뒤에, 그때 다시 꺼내도 늦지 않아."


나는 그의 현실적인 분석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한때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빛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다. 타협과 체념의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나는 그 불합리함을 견딜 수 없었다.


다음 날, 나는 현우 몰래 김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갔다. 육중한 나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된 책과 가죽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는 서가에 기대선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신지?" "교수님, 어제 발표된 문예지 당선작. 그거… 강현우 학생 작품이지 않습니까?"


김 교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그는 잠시 나를 훑어보더니,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학생,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그 글은 내 작품이 맞네. 강현우 학생의 글은 습작 수준이라, 내가 참고해서 좋은 방향으로 발전시켜 준 것뿐이야. 전혀 다른 작품이지."


"제가 두 원고를 다 읽어보았습니다. 발전이 아니라 복제에 가깝던데요. 그건 도둑질입니다."


나의 단호한 말에,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서가에서 몸을 떼고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삐걱이는 구둣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어린 사람이 아주 조심성 없이 말을 함부로 하는군. 자네, 지금 자네의 말이 강현우 학생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는 있는 건가?"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방 안의 온도를 몇 도는 떨어뜨리는 듯한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그 위협 앞에서, 내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이였는지를 깨달았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현우는 이유 없이 여러 공모전의 최종심에서 탈락했다. 업계에 '강현우는 스승을 물어뜯는, 성격 파탄자'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의 순수한 정의감이, 도리어 현우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나는 현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의 침묵은 어떤 비난보다 아팠다. 나는 그의 꿈을 가로막은 거대한 장애물이 되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 사건이, 저희 관계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현우의 이야기가 끝나자 회의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 대표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원망하셨었나요?"


“아니요.” 현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를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쉬웠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며 마른 입을 축였다. “그녀가 저를 믿고 기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요. 저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침묵하는 걸, 포기하거나 타협했다고 생각했겠죠. 제 계획을 믿고 기다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솔직히 좀…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유치한 마음 때문에 며칠간 제대로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작가인 저는 언제나 말로 싸우고 설득하는 사람이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닫아버린 겁니다. 그 침묵이 그녀를 더 외롭게 만들고, 결국 혼자서 그 위험한 선택을 하도록 등을 떠민 셈입니다. 제 침묵은 전략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절망이었을 겁니다.”


박 대표와 이 감독은 그저 말없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고백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었다.


“가장 후회되는 건,” 현우의 목소리가 잠시 잠겼다. “그 사건으로 인해 그녀 역시 '문단'이라는 제도권 안에서 작가가 되려던 꿈을 접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막았다는 그 끔찍한 죄책감을, 김 교수와 같은 권력의 벽을 직접 마주한 그녀가 온전히 혼자 감당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영원히 답을 찾을 수 없는 판결과도 같았다.


“제 문제를 해결하려다 받은 상처가, 결국 그녀의 길까지 막아버린 겁니다. 이후 그녀와 제가 점점 멀어진 것은 이 상처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그녀만의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때 저는… 제 꿈뿐만 아니라, 그녀가 꾸었던 꿈의 형태마저 망가뜨린 겁니다.”


현우는 말을 마치고 찻잔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떨리는 손을 감추듯 무릎 위로 손을 가져갔다.


“솔직히 저도 한동안 제 등단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익명의 은인이 방송사에 제 작품을 투고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처음으로 드러난 사실에 이준영 감독은 놀라움에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박진태 대표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데뷔조차 못 했을 테니, 죽기 전에 꼭 한번 뵙고 감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이제 와서는 찾을 방법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이준영 감독은 안경을 벗어 눈가를 꾹 눌렀다. 박진태 대표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비로소 한 편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두 개의 꿈이 서로를 지키려다 함께 부서져 내린 비극의 맨얼굴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기록하며 자신을 벌하고 있는 한 작가의 지독한 진정성의 무게를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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