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시간을 길게 만든다."
- 독일 속담 (German Proverb)
2025년 4월 22일.
현우는 정기 검진을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한 달 전 진단 당시에는 거의 없던 통증이 최근 들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허리 부근이 묵직하게 저려왔고, 밤에는 통증으로 잠을 설치는 날이 늘었다. 의사는 그의 차트를 확인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현우 씨, 최근 통증이 심해졌다고 하셨는데, 이는 암이 췌장 주변부로 퍼지면서 척추 신경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제부터는 통증 관리가 중요해질 겁니다. 진통제 처방을 받으셔야 합니다."
의사의 담담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통증이 없는 것이 자신을 기만하는 것 같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고통이 시작된 것이다. 진짜 고통이 시작되니 자신의 마지막 시간이 점점 가시화되는 듯했다.
그는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왔다. 병원 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평소와 같았지만, 등허리에서 시작된 묵직한 통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경을 짓눌렀다.
현우는 등에서 찌르르하고 올라오는 통증에, 찌그러진 영수증처럼 구겨진 과거를 떠올렸다. 연애 3년 차, 그날의 기억.
2020년 초봄, 하윤의 자취방.
현우와 하윤은 연애 3년 차에 접어들었고, 하윤은 입사 2년 차, 현우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일요일 밤, 현우는 미열이 오르는 몸을 이끌고 하윤의 집에서 다음 날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혹여 그녀가 이전처럼 쓰러질까 걱정되어 아무리 힘들어도 끼니만큼은 꼬박꼬박 챙기는 그였다. 어쩌면 이 시기부터,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그의 고집이 서서히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리를 마치자 두통이 심해졌다. 일그러져가는 그의 표정에 놀란 하윤이 손을 들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괜찮아?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사실 그 이상이었다. 지속적인 밤샘 작업과 학업, 학원 수업은 현우의 몸을 상상 이상으로 축내고 있었다.
"그래? 작업할 수 있겠어? 공모전 얼마 안 남아서 쓰긴 해야 하는데." 하윤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래야지. 써보자."
둘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지만, 현우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윙윙거리는 두통으로 가득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짧은 잠이라도 절실했지만, 마감일이 코앞이라는 하윤의 말에 차마 쉬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다음 날 눈을 뜬 현우의 몸 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미열은 고열이 되었고, 온몸의 근육통은 뼈마디를 쑤셨다. 결국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하윤에게 '컨디션이 좀 안 좋네. 하루 쉬면 괜찮을 것 같아'라는 짧은 문자를 보내고는 사경을 헤매듯 잠에 빠졌다.
이틀이 지나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그는, 죽을 배달시키고 나서야 지난 연락들을 확인했다.
‘그래 푹 쉬어. 공모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빨리 회복해서 작업하자.’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일어나면 연락 줘.’
‘아직 다 안 나았어? 걱정돼. 문자 보면 연락 줘.’
하루 한두 통씩, 총 세 통의 메시지. 아플 때마다 그녀의 곁을 지켰던 자신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죽이라도 하나 보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는 하윤의 애정이 식었다고 확신했다.
돌이켜보면, 하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거라 믿었고, 그가 보여준 지극정성의 보살핌은 고마움과 동시에 때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현우만큼 상대를 돌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현우는 서러움에 며칠을 더 앓아누웠다. 공모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날, 아무 소식도 없는 현우가 괘씸하고 서운했던 하윤은 결국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강현우! 안에 있지? 빨리 문 열어봐!"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깬 현우가 문을 열자, 씩씩대는 하윤이 서 있었다. 하지만 며칠간 씻지도 못한 그의 몰골을 본 순간, 그녀의 표정은 심통에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너 상태가 이렇게까지 안 좋은 거였으면 얘기를 했어야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잠수를 타?"
"그렇게 연락이 없으면 애가 심각한 상태구나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섭섭함에 현우가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나는 몰랐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요즘 나한테 서운해하는 것 같길래 혼자 있고 싶나 보다 하고 놔뒀지!"
하윤이 현우를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았다. "왜 왔어? 퇴근하고 힘들 텐데." 현우가 퉁명스럽게 비꼬았다.
"지금 비꼬는 거야? 나도 참다 참다 온 거야!"
"남자친구 아픈데도 모를 정도면 바쁘고 힘든 거 맞으니까."
하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참아왔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아픈 티를 내야 알 거 아니야! 나는 네가 괜찮은 줄 알았다고! 그리고 나도 힘들었어! 회사에서 치이고, 공모전 준비도 해야 하고… 나도 너한테 힘든 내색 안 하려고 노력했단 말이야! 근데 왜 너는 항상 네 생각만 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만 생각해? 그럼 나 좋으라고 너 아플 때마다 도시락 싸놓고 오냐? 네가 음식 상한 것도 모르고 막 먹으니까, 또 건강 버릴까 봐 챙기는 거지."
"다 자기만족이지! 내가 언제 챙겨달랬어? 그거 네가 안 하면 불안한 거잖아! 나는 부담스러웠다고!"
그 한마디가 심장에 박혔다. "그게 할 소리야!? 나는 너 또 쓰러질까 봐 무서워서 그랬던 건데 내 자기만족이라고?"
"그러니까 그 힘든 걸 내가 부탁했냐고! 나도 직장 다니면서 힘든데 네가 와서 그렇게 요리하면 신경 쓰인다고!"
"너 진짜 그딴 식으로밖에 말 못 해?"
"그래! 이렇게밖에 못 해! 막말로 너는 제대로 된 직장 생활도 해본 적 없잖아? 네가 업무로 사람들이랑 엮여서 스트레스를 받아? 일하면서 눈치 볼 사람이 있어? 근데 뭐가 그렇게 힘든데? 네가 직장 생활을 알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었다. 마지막 말에 현우의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은 앞선 어느 말보다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아차.' 하윤이 이성을 차렸을 땐, 이미 현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인생 일부가 부정당하고, 헌신마저 버림받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정말이지 미숙한 소녀와 찌질한 소년의 싸움이었다. 현우는 더 이상 싸울 힘도 없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하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끝내 그녀는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못 만나겠다"고 말하고는, 집을 뛰쳐나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현우는 주저앉았다. 자기반성과 원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그는 서러움에 울분을 토하며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주변은 환했다. 여전히 몸에 힘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며칠간의 고열과 마음고생으로 탈진한 몸을 이끌고 겨우 병원으로 향했다. 링거를 맞고 정신을 차린 후에야, 그는 어제의 대화를 되짚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요즘 직장 스트레스로 매일을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진을 쏙 빼고 집에 돌아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안기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까지 아파서 삐쳐 있었으니, 그녀가 폭발한 데에 자신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하윤의 발언들은 여전히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원인 제공을 한 것이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몸이 아프니 인내심이 바닥나 어린애처럼 군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현우는 퇴근하는 하윤과 마주쳤다.
"왜 왔어." 시큰둥하고 건조한 말투였다.
"그… 사과를 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할 말 없어서 어제 그렇게 보낸 거 아니야?"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그랬어. 미안해. 계속 연락도 안 하고.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까?"
하윤은 순순히 그를 집으로 들였다. 자취방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하윤아, 내가 미안해. 너 걱정할까 봐 말을 못 했어. 근데 내가 말 안 해도 네가 알아주길 바랐나 봐. 너한테 너무 많이 기대고 있었어. 정말 미안해."
그 말을 듣고 하윤의 표정이 조금 풀어진 듯했다. 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미쳤나 봐. 한 번만 봐주라. 직장에서 고생하는 거 알면서 그런 식으로 군 거, 정말 미안해. 진심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 못 만나겠다는 말만 취소하면 안 될까?"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우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채, 약간의 애교를 섞어 얘기하는 현우의 모습에 결국 하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알겠어. 안아줘. 최 팀장 그 인간 오늘도 아주 지랄견이었어. 뭐가 문젠지 하루 종일 꽁해가지고. 후… 빨리 안아줘."
현우는 모아뒀던 두 손을 풀고 하윤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숨이 막힐 정도로 꽉 껴안았다. 볼에서 볼로 전해지는 온기, 보드라운 피부, 은은한 샴푸 향. 이 모든 포근함을 그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한참을 껴안고 있던 둘은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점차 서로를 탐하는 깊고 진한 키스로 변해갔다. 현우는 하윤을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겼다. 서로의 숨결이 귓가를 스치며 몸을 달궜다. 그의 손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살결 위로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작게 신음하며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머리에 새기듯, 세심한 손길로 온몸을 어루만졌다.
"사랑해. 상처 줘서 정말 미안해."
하윤이 그의 귓가에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나 칭찬받아야 해. 너 없는 사이에 우리 공모전 내려던 거 다 써서 제출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현우가 그녀를 거칠게 뒤로 눕혔다. "진짜로? 넌 어쩜… 넌 정말 완벽한 여자야. 사랑해. 자기야."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몸에 몰두했다.
하윤이 잠시 두 손을 현우의 어깨에 갖다 댔다. "오늘 먼저 와서 사과해줘서 고마워. 나도 앞으로 더 자기한테 신경 쓸게. 그리고 도시락 싸주는 거 고마워. 그때 나도 스트레스받은 걸 그냥 자기한테 다 쏟은 것 같아. 미안해, 진짜로."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하윤은 어깨에 올린 두 손을 그의 목 뒤로 감싸 끌어당겼다. "그럼 도시락 계속 해줄 거야?"
"당연하지. 그거 뭐 어려운 거라고."
하윤이 그를 더 가까이 당겨 입을 맞췄다. "고마워."
현우가 다시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내가 더 고마워. 이렇게 말해줘서. 앞으로 우리 싸우지 말자."
영원하지 않을 걸 알지만 영원하기를 바라는 약속을 하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4월의 가장 뜨겁고 긴 밤이었다.
다시 허리에 통증이 느껴져, 현우는 진통제를 삼키고 소파에 앉았다.
약은 잠시 물리적 고통을 잠재워주겠지만, 기억 속 아픔은 그대로였다. 그는 해결되지 않은 채 봉합되었던 그날의 상처를 떠올렸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차가운 플라스틱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어쩌면 이제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서야, 그 고통의 진짜 의미를 써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