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2025년 3월 12일

by msg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이것이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무언가를 하는 것만이 상황을 바꾼다."
- 앤디 워홀 (Andy Warhol)



2025년 3월 12일

리모컨 버튼이 딸깍, 소리를 냈다. 스크린의 흰 장막 위로 첫 화면이 미끄러졌다. 프로젝터에서 뿜어져 나온 희미한 열기가 회의실의 서늘한 공기를 데웠다. 벽 시계는 수요일 오전 10시 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은, 세 사람이 모여 현우의 과거를 한 조각씩 맞춰나가는 날이었다.


“…그렇게 6개월간 매달린 첫 연애물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되었고, 저희는 다음 해 1월까지 촬영과 편집을 직접 진행했습니다.”


현우는 스크린에 띄워진 파워포인트 화면을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화면에는 '스무 살, 첫 짝사랑'이라는 가제 아래, 풋풋하지만 어설픈 촬영 현장 사진들이 스쳐 지나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카메라를 든 스무 살의 그와, 옆에서 스크립트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하윤의 모습. 그의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결과는… 예상보다 참담했습니다.”


현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프로젝터 팬이 돌아가는 낮은 소음만이 정적을 채웠다. 눈을 감자, 그날의 강당에 감돌던 미지근한 침묵이 피부에 와닿았다. '노력하면 뭐든 된다'는 신념이 산산조각 나던 순간. 그는 기억 속에서 자신의 등을 두드리던 하윤의 손길을 선명히 느꼈다. 그 따뜻한 위로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당시의 자신은 얼마나 무지하고 이기적이었던가.


다시 눈을 뜬 현우는 박진태 대표와 이준영 감독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호기심과 함께, 한 젊은 창작자가 겪었을 첫 좌절에 대한 공감이 어렸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시나리오만큼은 완벽하다고 자부했지만,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아마추어들의 열정만으로 전문성의 벽을 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죠. 그때까지 제 인생의 유일한 벽은 '공부'뿐이었고, 그 벽은 노력으로 넘을 수 있었기에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진태 대표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죠. 그런 경험이 오히려 좋은 작가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현우가 동의했다.

“그 좌절은…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군 입대 영장을 받았습니다.”


군 입대. 2016년 1월, 시나리오 실패의 쓰디쓴 잔해 속에서 그가 내린 결정이었다. 군대는 이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현우의 군 생활은 회색빛이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통제된 자유, 반복적인 훈련들. 창작과는 거리가 먼, 철저히 비효율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시간은, 그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서 살아왔는지 깨닫게 했다.


세상은 그의 시나리오처럼 논리적으로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 안에서 '인간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펜을 쥘 시간은 부족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그곳에서 조용히 성장하고 있었다.


길고 지루한 군 생활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바로 하윤의 편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편지여서 더욱 설렜고, 그는 내무반 침상에 엎드려 닳아빠진 편지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첫 번째 편지, 2016년 4월 10일


현우에게, 안녕? 네가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나는 파리에서 한 달 남짓 지냈을 거야.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어리둥절한 나날이야. 여기는 정말 영화 속 풍경 같아. 에펠탑은 생각보다 더 웅장하고, 세느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아.


그런데 막상 와보니 영화에서 보던 낭만만 있는 건 아니더라. 지하철은 복잡하고, 사람들은 불어만 쓰고, 길은 미로 같아. 그래도 미술사 수업은 정말 흥미로워. 루브르나 오르세 같은 미술관에 가서 직접 그림을 보며 수업을 들으니, 책으로만 보던 작품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어제는 '모나리자'를 봤는데, 생각보다 작아서 좀 놀랐어. 그런데도 그 묘한 미소는 눈을 떼지 못하게 하더라. 너는 군대에서 잘 지내니? 밥은 잘 챙겨 먹는지 걱정돼. 가끔 혼자 거리를 걷다가, 우리가 과방에서 같이 시나리오 쓰던 때가 생각나.


그때는 그렇게 치열했는데, 여기서는 조금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많아. 이 낯선 풍경 속에서 익숙한 그리움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네. 몸 조심히 잘 지내. 종종 또 편지할게. 2016년 4월의 파리에서, 하윤이.


(편지지 한쪽 구석에는 서툰 듯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진 에펠탑 스케치가 있었다.)


그는 편지지 한구석, 삐뚤빼뚤하게 그려진 에펠탑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총기 기름 냄새 밴 손끝 아래서, 낯선 도시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른거렸다.


두 번째 편지, 2016년 6월 13일


현우야, 잘 지내고 있지? 네 편지는 소식이 아니라 한 권의 책 같아서 올 때마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여기는 이제 제법 파리지앵처럼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 갔었는데, 모네의 그림들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빛과 색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네가 '주인공의 감정이 겉돈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던 순간들이 문득 떠올랐어.


그때는 막막했는데, 여기 와서 그림들을 보니 '아, 이게 감정이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있어. 가끔 너의 분석적인 질문들이 그리울 때도 있어. 네가 있었다면 이 그림을 보며 어떤 질문을 했을까,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냈을까 궁금해질 때가 많아.


어쩌면 우리가 썼던 시나리오가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건 사실 우리 각자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아. 그때 난 네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


몸 건강히 잘 지내. 2016년 6월의 파리에서, 하윤이.


(편지지 여백에는 오르세 미술관과 모네의 '수련' 연작 중 한 조각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편지는 그가 잊고 있던 작가로서의 감각을 계속해서 일깨웠다. 소등 후의 어둠 속에서, 그는 그녀가 보았을 빛의 색채를 상상했다.


세 번째 편지, 2016년 9월 20일


현우야, 가을이 오니 파리도 제법 쓸쓸해졌어. 낙엽이 굴러다니는 거리를 걷다가 문득 네 생각이 나서 편지를 써.


여기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여유'인 것 같아. 예전에는 성공에 대한 강박 때문에 이런 시간은 사치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몽마르뜨 언덕에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는 가난한 화가를 봤어.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지만, 그는 내가 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어. 어쩌면 우리는 결과에만 너무 집착했는지도 몰라.


물론 그 자유 뒤에는 '고독'도 따라오더라. 혼자 맛있는 걸 먹을 때, 혼자 멋진 풍경을 볼 때, 문득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 네가 학원 끝나고 과방으로 뛰어오던 모습, 밤늦도록 투닥거리면서 시나리오를 고치던 시간들.


그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시간들이 가장 치열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어.

건강 조심하고, 몸 다치지 말고. 2016년 9월의 파리에서, 하윤이.


(손때 묻은 종이 위에는, 파리의 어느 작은 카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 역시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그리워하며 단단해지고 있었다.


네 번째 편지, 2017년 1월 15일


현우에게, 새해가 밝았네. 이제 교환학생 프로그램은 마무리되었고, 남은 기간 동안 혼자 유럽을 여행 중이야.


매일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얼마나 작은 세상에 갇혀 살았는지 새삼 깨닫고 있어.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돼.


네가 항상 '인물과 상황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던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이 모든 경험들이 언젠가 우리가 함께 쓸 작품의 중요한 토대가 될 거라고 믿어. 돌아가면 우리 또다시 머리 맞대고 글 쓸 수 있을까?


파리에서 얻은 영감과 네가 군대에서 얻은 새로운 시각을 합치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아.

건강하게 보자. 2017년 1월의 이탈리아에서, 하윤이.


(엽서 크기의 종이에는, 거친 연필선으로 그려진 산봉우리와 그 아래 작은 마을 풍경이 담겨 있었다.)


'다시 머리 맞대고 글 쓸 수 있을까.' 그 문장이 남은 군 생활을 버티게 할 연료가 되어주었다.


다섯 번째 편지, 2017년 5월 20일


현우야, 잘 지내고 있지? 이 편지가 네게 닿을 때쯤이면 나는 또 다른 도시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좀 더 긴 여행을 떠나려고 해.


한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쳐 갈 생각이야. 그래서 이 편지가 네가 한국에서 받을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아.


하지만 걱정 마. 나는 어디에 있든 너를, 그리고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이야기를 잊지 않을 거야. 어쩌면 네가 전역하고 얼마 안 돼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몰라. 우연처럼 말이야. 그때는 우리가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 벌써부터 기대된다.


몸 건강히, 무사히 전역해.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그때까지 안녕. 2017년 5월, 아주 먼 길을 떠나기 전, 하윤이.


(편지지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림 위에는 '다시, 우리의 이야기'라는 작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2017년 10월, 현우는 마침내 전역했다.


그리고 전역 후 한 주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하윤이었다. 그녀는 긴 여행을 마치고 막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캠퍼스 인근의 작은 찻집에서 만났다. 은은한 국화차 향기가 감도는, 시간이 느리게 흐를 것 같은 공간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하윤의 얼굴에는 전 세계의 경험이 새겨져 있었다. 여전히 눈부셨지만, 풋풋함 대신 한층 깊어진 여유와 성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찻잔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현우는 찻잔을 든 그녀의 손을, 하윤은 조금 더 단단해진 그의 어깨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너, 뭔가 달라졌다." 하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엔 날 선 칼날 같았는데, 지금은… 잘 벼린 둥근 돌 같아."


"누나도.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오더니 얼굴이 변했네. 좋은 의미로."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의 간극이 그 짧은 대화로 메워졌다. 그들은 밀린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화의 끝에, 하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현우야, 우리 다시 글 쓸까? 그때 못다 한 이야기, 더 깊어진 이야기. 우리가 함께라면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현우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살짝 잠긴 목소리로 오래도록 참아왔던 한마디를 내뱉었다.


“우리 연애… 하자, 하윤아.”


“이제 누나도 안 붙이네. 이거 이거 벌써부터 괘심한데.” 너무 오래 기다렸던 말을 들은 하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쏘아붙였지만, 입가에 번지는 미소는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나랑 연애 해? 안 해?” 현우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해, 해, 해! 해야지. 너 나랑 안 하면 누구랑 하려고 했는데? 아오, 이 얘기까지 2년 반이 넘게 걸리는 이 답답아!”


그녀의 웃음 섞인 타박에, 마침내 긴장했던 어깨가 풀렸다. 그녀는 현우의 손을 꽉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는 이번에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2017년 10월 25일 가을, 길었던 '썸'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그들의 뜨겁고 치열한 사랑이 시작되려 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자 회의실에는 잠시 고요가 흘렀다. 박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두 사람의 성장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변곡점이네요.”


이준영 감독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며 말했다. “금요일까지 이 부분 시퀀스 초안 부탁드립니다. 특히 재회 장면은 감정선이 중요하니, 인물의 움직임과 시선까지 구체적으로 적어주십시오. 참고할 만한 음악도 몇 곡 첨부해주시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금요일 오전 10시 전에 드리겠습니다.”


현우는 노트를 덮었다. 이제, 그의 가장 빛나던 시절은 스크린 위에서 가장 아픈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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