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낭비하는 것이다."
- 세네카 (Seneca)
코끝에 남은 소독약 냄새가 채 가시기 전, 눈을 떴다. 익숙한 내 방 천장은 어제와 다름없이 하얗고, 공허했다. 진료실의 풍경은 꿈처럼 아득했지만, 눈꺼풀을 스치는 아침 햇살은 그것이 냉혹한 현실임을 알렸다. 관절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거울 속 내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아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멀쩡해 보였다. 그 기만적인 건강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이 빌어먹을 상황, 나를 배신한 몸, 이 불합리한 세상을 향한 지독한 쓴맛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겨우 서른. 이제 막 내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종영하고, ‘작가 강현우’라는 이름이 세상에 각인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찬란한 시작과 동시에 끝을 마주해야 하다니.‘억울하다’는 말로는 이 처참한 감정을 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벽 시계가 오전 7시를 가리켰다.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평소 같으면 미래를 위해 나를 불태우고 있을 시간. 모든 계획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베개를 벽에 던졌고,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솜이 터져 나오는 이불을 손톱으로 갈가리 찢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이 거친 숨이 되어 터져 나왔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힘없이 주저앉았다. 얼굴을 감싼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화를 낸다고 뭐가 달라지나.’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1년. 이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까. 텅 빈 마음엔 재처럼 식은 의욕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나는 습관처럼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죽음은 나의 상상을 한정했다. 끝이 정해진 이야기는 막다른 길이었다. 지금 쓰는 한 글자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강박이 손목을 죄었다. 펜은 종이보다 허공에서 더 오래 머물렀고, 문장이 망가질 때마다 나는 노트를 북북 찢었다. 쓰레기통은 금세 찢긴 종이의 무덤이 되었다.
혼돈의 끝에서, 문득 날카로운 질문 하나가 스쳤다. ‘이 모든 것의 끝에, 세상이 나라는 사람을 기억할 만한 무언가가 없다면, 과연 편히 눈 감을 수 있을까?’
평생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썼지만, 정작 내 이야기는 없었다. 이대로라면 나의 짧은 삶은 죽음과 함께 먼지로 흩어질 터였다.
나는 책상 한편의 낡은 노트를 펼쳤다. 꾸며낼 필요가 없는 이야기.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록. 새로운 창조가 불가능해진 나에게,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은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딸깍-윙-. 전기포트 끓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막 분쇄한 원두 향이 공기 중에 번졌다. 커피의 뜨거움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날뛰던 심장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곧장 낡은 노트 위에 내일 있을 영화사 미팅 시놉시스를 정리했다. 모든 정리가 끝났을 때, 나는 박 대표에게 연락했다.
“대표님, 강현우입니다. 시나리오 방향을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생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걸 영화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 삶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수화기 너머 박 대표의 목소리에는 당혹감보다 천진한 설렘이 묻어났다. 즉, 그의 사업가적 직감이 발동한 듯 했다.
“좋습니다. 작가님 같은 사람이 삶을 담아 쓴다면, 뭔가 큰 게 나오겠군요. 내일 미팅 때 더 상세한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작업을 마치고 그대로 잠들었다. 새벽 다섯 시, 어김없이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짙은 군청색 어둠에 잠겨 있었다. 오랜 습관이 아닌, 명확한 목적이 몸을 깨웠다. 침대의 온기를 뒤로하고 서재로 향했다. 어젯밤의 광풍이 휩쓴 책상 위에는, 낡은 노트북과 펜이 꽂힌 두툼한 노트만이 섬처럼 놓여 있었다.
온라인 미팅 화면이 켜지고, 약속된 시간에 박진태 대표와 이준영 감독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감독님.” 나는 차마 그들의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창밖의 희뿌연 풍경에 두었다.
“두 분께서 제게 기대하시는 바를 잘 압니다. 20대의 치열한 사랑, 거기에 제 작가로서의 철학을 담아달라고 하셨죠. 저는 그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하지만 더 진실되게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 작품은 제가 써왔던 그 어떤 대본보다 솔직하고, 그래서 가장 슬프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이 작품은 제 마지막 각본이 될 테니까요.”
내뱉은 말들이 무쇠처럼 가라앉았다. 화면 속 두 사람의 얼굴이 굳었다.
“얼마 전,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제게… 이 작품을 만들 시간은 1년 내외로 남아있습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박진태 대표가 마이크를 켰다.
'틱' 하는 작은 소음. 평소의 천진난만함은 온데간데없는, 무겁고 진지한 목소리였다.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지금… 글을 쓰셔도 괜찮겠습니까?”
그 질문에는 작가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네, 꼭 써야겠습니다. 여행도, 못해본 것들도 생각해봤지만 결국 글을 쓰는 것 말고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준영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쩌면 가장 좋은 작품이 나올 환경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작가님 몸이 작업을 감당하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혼자 작업하실 생각입니까?”
“네. 제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다른 사람이 붙으면 오히려 작업이 더뎌질 겁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완성하겠습니다.”
“확고하시군요.” 박 대표가 대화를 이어받았다. “그럼 작가님, 언제까지 초고를 받을 수 있을까요? 3개월 안에 작업이 완료되지 못하면, 작가를 교체하고 프로젝트를 다시 구성해야 합니다.”
“3개월 안에 완성본에 가까운 초고를 들고 오겠습니다. 주 단위로 작업 경과도 공유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강 작가님은 몸 관리 잘하시면서 작품에만 전념하십시오. 나머지는 저희가 해결할 문제입니다.” 박 대표의 눈에 처음으로 따뜻한 걱정이 스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분 믿고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노트북을 덮자, 방 안에는 다시 새벽의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시작이었다. 과연 나는 내 20대를 제3자의 관점에서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과거를 파헤치다 그 속에 남은 지독한 후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낡은 노트의 표지를 가만히 쓸었다. 이 마지막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나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보내는, 닿지 않을 길고 아픈 연서(戀書)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글을 쓰기로 한 것도, 그녀가 떠나는 나를 한 번쯤 불쌍히 여기고 기억해주기를 바라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기억 속에서 조금이나마 행복한 추억으로 오래 살아남고 싶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