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25년 2월 28일

by msg


"문제는, 당신에게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부처 (Buddha)



2025년 2월 28일

여느 때와 같은 오후, 현우는 노트북 앞에서 새로 구상하는 시나리오의 마지막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타인의 삶을 엮어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 그 세계 안에서 그는 전능했다. 모니터의 희미한 열기, 옅게 퍼지는 원두의 산미, 손끝에 익숙하게 감기는 키보드의 감촉. 모든 것이 안온한 질서 안에서 완벽한 제자리를 찾았다.


막연한 허공에 쏘아 올렸던 스무 살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담긴 작품이 세상에 나와 영상으로 살아났고, 대중의 인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벌써 이보다 완벽한 다음 시나리오를 써낼 미래를 그렸다. 죽는 순간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못하는 삶. 그것이 그가 꿈꾸는, 완벽하게 제본된 생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책상 위 휴대폰이 '드르륵' 짧고 날카롭게 몸을 떨었다. 발신자 정보에 뜬 것은 낯선 병원 번호였다.


“강현우 님 맞으십니까? 얼마 전 받으신 건강검진 결과가 나와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 언제 확인하러 가면 될까요?”


본격적인 집필 전 거치는 통과 의례일 뿐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정해진 대사를 읊는 배우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기계적인 친절함 아래,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의 가장자리가 날카롭게 귀에 걸렸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방문해주시길 바랍니다.”


현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목울대가 바싹 마르고, 들이마신 숨이 폐부까지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셔츠 깃이 목을 조여와 손가락으로 깃을 벌렸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당장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전화를 끊자 손바닥이 축축했다.


다음 날, 그는 혼자 병원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소독약과 묵은 종이 냄새가 눅눅하게 뒤섞인 진료실. 탁한 공기 속으로 의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목소리는 더없이 단정했으나, 그 단정함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형태의 예의였다.


의사가 내민 서류를 현우는 기계적으로 받아 들었다. 손끝으로 차갑고 매끄러운 종이의 감촉이 전해졌다. 그의 모든 세계를 통제하던 손이, 이제 이 얇은 종이 한 장에 저당 잡혔다.


“영상에서 보시는 것처럼 췌장 미부에 덩어리가 확인되었고, 조직 검사 결과….”


의사는 조심스럽게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의 CT 영상을 확대했다. 회색빛 장기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지도로 펼쳐졌다. 그리고 그 지도 한가운데, 췌장의 꼬리 부분에 작지만 치명적인 얼룩이 박혀 있었다. 그림자, 아니, 종양이었다.


“췌장암 4기로 진단되었습니다.”


귀 안쪽에서 '삐-' 하는 이명이 울렸다. 의사의 입 모양만 보일 뿐, ‘췌장암 4기’라는 단어는 소리를 잃은 채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고막을 할퀴었다.


현우의 눈은 모니터 속,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자신의 맨몸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오류일 확률을, 이 모든 상황이 잘못된 데이터의 나열일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채찍질하며 달려온 몸이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는 진실만이 차갑게 남았다.


의사의 설명이 차분한 폭력처럼 이어졌다. 전이가 의심되는 부위를 짚는 손가락, 예후를 가늠하는 문장들이 쉴 새 없이 파고들었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진료실 벽지가 뒤틀리고, 의사의 펜 끝이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평생을 통제했던 세계가 액체처럼 흘러내렸다.


“얼… 마나… 남았습니까?”


목구멍을 긁어내는 듯 거친 목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의사가 펜을 내려놓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금속 펜이 나무 책상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그 눈에는 연민도, 희망도 없었다. 수많은 죽음을 목도한 자의 담담한 체념만이 어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1년 내를 예상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적극적인 항암 치료로 시간을 버는 것. 둘째는 증상 완화에 초점을 맞춰, 통증을 관리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입니다.”


항암. 완화. 단어들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가 무의미하게 떨어져 나갔다. 세상이 수채화처럼 번지고, 모든 초점이 물감처럼 흘러내렸다. ‘남은 시간’이라는 단어가 서늘한 망치처럼 관자놀이를 내려쳤다. 그의 시간은,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진료실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잔인할 정도로 눈부셨다.평생을 앞만 보고 달려왔던 한 남자의 서사가, 강제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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