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음산에서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낯선 곳을 찾아 처음으로 나설 때는 나이가 들 만큼 든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그 기분은 새로운 산을 향할 때라고 하여 다르지 않다. 미경험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은근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오음산을 산행지로 선택한 것도 중고(中古)가 다된 내 심신에 새바람을 불어 넣어보려는 은연(隱然)한 내심의 발로이었다.
오음산(五音山 930m) 산행기점은 홍천과 횡성을 잇는 5번 국도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삼마치고개라는, 나에게는 오지라고 여길 만큼 생소한 곳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5번 국도는 춘천 홍천 횡성 원주 등 강원도 내륙 주요 도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간선도로인 만큼 삼마치고개나 오음산이 이 부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을 듯싶다.
삼마치(三馬峙)는 양옆으로 높은 산을 끼고 있는 한적한 고갯마루여서 옛날에는 화적들이 출몰하였을 것 같은 으슥함이 깃들어 있었다. 고개 서편 색색의 산악회 안내 리본이 몇 개 눈에 띄게 매달려 있는 곳으로 가닥을 잡아 급경사를 더듬어 올라선다. 몇십 년을 인고하며 자랐을 키가 껑충 큰 소나무들이 무더기로 허리가 뚝뚝 부러져 길을 가로막으며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마치 임꺽정이 같은 천하장사가 뒤틀린 심사를 억제하지 못해서 마구 부러뜨리며 짓밟고 다닌 것처럼 생각되는 장면이었다. 하나둘도 아니고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왜 이렇게 참혹하게 쓰러져 있는 것일까? 가장 근접한 상상이라면 지난겨울 대설시 두텁게 내려앉은 눈의 무게와 아울러 몰아치는 강풍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렇게 되었을 것이란 것이다.
3월 중순이라지만 강원도 산골의 높은 산에는 아직도 잔설이 많겠지 싶었으나 북향바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흔적도 없다. 따스한 햇볕을 받고 산 전체가 생동하는 봄의 기지개를 활짝 켜고 있는 품이 역력하였다. 아직 산자락이나 나무들이 발하는 빛깔은 갈색이나 회색을 벗지 못하고 있어도 가지의 눈[芽]들은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듯한 약동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친절한 리더는 마치 식수가 산행에 있어서 필수의 병기라도 되는 양 수통에 물 채울 데를 일러준다. 이 산은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아니 그 뒤로도 한동안 물이라곤 한 방울도 나오는 데가 없으므로 일찌감치 휴게소에서 수통을 채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물을 별로 마시지 않아도 잘 견디는 나로서는 식수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이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물병조차 챙겨오지 않았다. 적게 마시고 덜 빼내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땀을 별로 흘리지 않으므로 수분 보충 없이도 힘들거나 불편을 느끼지 않는 편이다.
산길로 접어들어 공터까지 30분간, 공터를 뒤로하고 울창한 숲 터널을 헤치고 능선 따라 25분 거리는 콧노래를 불러도 무방할 만큼 평탄한 길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코가 땅에 박힐 듯한 급경사의 비탈이 거대한 물체처럼 앞을 막으며 겁을 잔뜩 준다. 높은 곳을 바라보며 올라야 하므로 힘든 것은 차치하고라도 닥치는 대로 크고 작은 물푸레나무 또는 참나무 등 가까이 손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잡지 않고는 흘러내리듯 미끄러져 한 발짝 떼기가 수월찮다. 간혹 매설된 지뢰처럼 갈잎이나 흘러내린 흙 부스러기 속에 숨어있는 빙판을 잘못 밟았다가는 나뒹굴기 십상이다. 주위에 흩어져 있는 일행들이 산벽(山壁)에 붙어 서서 나무뿌리를 잡아 뽑으려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으나 안전하고 쉽게 오르기 위한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10여 분의 실랑이 끝에 쉬기 좋은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편편한 자리를 골라잡아 걸터앉으니 마침 지나가는 바람결이 달고 시원하다. 비로소 힘들여 오른 보람을 갖는다.
강이나 산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이름에는 무엇인가 작의(作意)가 있다면 이 산을 오음산¹이라 하게 된 뜻을 짐작해본다. 쉽사리 떠오르는 것으로 산에서 들을 수 있는 5가지 소리라 한다면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말고 또 무엇 무엇이 있을까? 어느 산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세 가지 소리 외에 얼른 생각나지 않는 것이 특별히 있기에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밤이면 산이 울기라도 한단 말인가, 봄에 핀 꽃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라도 낸단 말인가. 누구의 힌트 없이는 짐작조차 어렵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40분만인 정각 12시에 정상 삼각점을 밟았다. 정상 도착 4,50분은 수직같이 가파른 비탈이어서 몹시 힘들었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가볍게 올라온 편이다. 정상은 7,8평의 좁은 공간이어서 뒤 미쳐 올라온 후미 그룹에 자리를 빼주고 우리는 곧 하산 길로 들어섰다. 정상을 뒤로하고 동쪽 주 능선으로 5분쯤 내려간 안부 갈림길에서 사기장골을 향하여 남쪽으로 향하자니 정글을 연상시키는 덩굴나무들이 널브러져 있다. 잎이 무성했을 여름철이라면 길 찾기가 대단한 고역일 것 같다. 밟히는 토양은 새카맣게 걸은 것이어서 누군가는 감자를 심었으면 잘되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이 방면에 일가견이 있는지 이곳 칡뿌리는 쓴맛일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한동안 마른 계곡이 계속되었으나 마침내 맑은 계곡물이 쫄쫄거리며 새어 나오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큰 내를 이루며 불쑥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목욕 소들이 즐비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은 손이나 낯을 씻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와폭에 반석 위를 흐르는 계류를 보게 되니 기분은 한층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볍다.
길가에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노랑나비 한 마리가 퍼득이며 나르는 모습이 ‘봄을 데리고 왔습니다’는 짤막한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그동안 그런 듯 아닌 듯 헛갈렸으나 계절의 전령사를 만났으니 이제는 정녕 봄이라는 생각이 확고하다.
¹ 다섯 장수가 나면 재앙을 입는다는 말이 전해지며 마을 사람들이 산릉에 구리를 녹여 붓고 쇠창을 꽂자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오르며 다섯 가지의 울음소리가 사흘 밤낮에 이르더니 주인 없는 백마 세 마리가 고개를 넘어 어디론지 사라졌다는 전설에 따라 산은 오음산(五音山), 고개는 삼마치(三馬峙)라 한다는 기록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