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의 매력
이제는 산을 기후조건이 쾌적한 봄이나 가을에나 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언제 찾아도 그때그때의 독특함과 새로움을 느낄 수 있고 계절마다 변화를 주며 풍기는 색다른 분위기 속에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거운 마음으로 완상 할 수 있는 곳임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이 잎을 모두 떨구고 스산하게 서 있는 호젓한 산길. 그 오솔길 사이 발에 밟히는 마른 잎들의 가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걷노라면 아무리 부러울 것 없을 유복한 자들도 산이 자아내는 고적한 분위기 속에서 자기 성찰에 잠겨볼 것이다.
초겨울 산은 범상한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철학적’이게 하는 마력이 있다. 날씨조차 곧 눈이라도 내릴 듯 음울하면 그 상황은 더욱 고조되리라.
겨울 산행은 짧은 해에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가까이 있는 야산이어도 족하다. 구태여 큰 산이 아니어도 즐기기에 하등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다만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으면 되는데 마침 겨울의 산속은 인적이 드문 편이다.
겨울 산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매력은 스산하고 허허로운 기분 속에서 그리움 같은 감상에 젖어 걷다가 첫눈을 맞는 파격이다. 내딛는 발길 앞에 무엇인가 듣는 듯한데 자세히 형상화하려면 사라지고 흔적도 없다. 처음에 눈은 이렇게 보이는 듯 지워지는 모습으로 있다.
하나둘 나풀거리던 설편(雪片)은 차차 마른 잎사귀에 사뿐 내려앉는 것이 눈에 잡히고 어느새 성긴 눈발이 임간(林間)에 희끗희끗 휘날리고 있음이 뚜렷할 때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환희의 파문이 격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이때 ‘눈 온다!’고 외쳐보고 싶은 충동은 누구나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눈이 때때로 내리고 또 그 위에 덧쌓이기를 거듭하여 온통 하얗게 뒤덮인 설산의 장관을 맛보려면 겨울 장비를 단단히 갖추고 1월 말이나 2월 초쯤을 택하여 높고 깊은 산을 찾아 나서야 한다.
눈이 많기로는 설악 지리 덕유 한라 등 명산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되는 도로 남쪽의 제왕산(帝王山)이나 북쪽의 선자령(仙子嶺)이 생각난다. 제왕산에서는 수십 미터나 되는 비탈길을 수북하게 뒤덮은 가루눈 위에 털썩 주저앉아 미끄럼 타며 단숨에 내리닫던 동심의 즐거움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선자령에 가던 때는 마침 전날 밤에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던지 허리 위까지 푹푹 빠지도록 쌓였었고 길 없는 길을 선두에서 10여 명의 각 산악회 젊은 리더들이 교대로 러셀을 하며 2,3시간 만에야 겨우 작은 언덕이라 하여도 무방한 봉우리에 올랐었다. 보통 때라면 10여 분 걸어 도달할 거리를 이렇게 힘들게 갔던 성취감을 힘찬 만세로 울려 보내며 환호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겨울 산의 매력은 삭막함 속에서 나와 내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단순한 순백색 하나 만의 조화로 오색으로 물든 가을 산의 현란한 단풍을 능가할 만한 진한 감동을 안겨주는 데 있다. 이번 겨울에는 얼마나 많은 눈이 또 얼마나 자주 내려줄지 기대해 본다. (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