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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Dec 15. 2021

다 아무것도 몰라

바람불기


“ 나도 몰라 너도 몰라 결국에는 아무도 몰라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것도 몰라 ”

- 장기하와 얼굴들 <그건 니 생각이고>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건 나잇값만큼의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괜찮게 나이 들어간다는 건 모른다는 말을 산뜻하게 뱉는 것이다. 두터운 껍질 같은 나이테의 사람에게는 산뜻한 바람이 불어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거기엔 실제로 살아온 세월의 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나잇값'은 '어른값'이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의 가장 큰 소원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심리학 책이나 자기 계발 도서를 좋아했고 교과서처럼 진리라 생각하며 읽었다. 지금에서야 알지만, 스스로를 잘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리학 책이나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 다양한 환경이다. 다양한 장소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쌓아야 나를 알게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 고등학생 신분이란 무엇인가. 세상 가장 루틴한 일상을 강제적으로 살아내는 집단이다. 나의 자아 이해의 욕구는 3년 내내 응어리져있었고 그동안 나는 괜찮은 자존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20대 초반 동안 열심히 새로운 것들에 도전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 있다면, 거기에 나를 그냥 던져놓았다. 고등학생 동안에는 스스로를 소극적이고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새로운 사람을 닥치는 대로 만났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아리에 들어가고, 칵테일바부터 피팅까지 새로운 일을 해보고, 클럽에서 쉽게 사람을 만났다. 지금도 나는 사람을 쉽게 사귀거나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해보지 않고 결론 내리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나는 도전을 즐기는 사람이었고 까다로움, 예민함은 나의 큰 무기였다. 그렇게 2, 3년을 거쳐 두꺼운 투명 알 속에서 창문 하나만 열어두던 시절을 통과해왔다. 나를 잘 알아서 두려울 게 없어졌다.



그런데,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새로움은 끊임없이 나에게 달려들고, 한 달이 우습게 모습을 바꾸는 나라는 존재는 친밀하다가도 외따로 떨어진다. 저번 주 친구들과 했던 '만약에 ~ 상황이라면' 같은 대화에서 예상한 나와 지금 살아있는 나는 또 다르다. 줄기는 뿌리박고 있고 잔 잎사귀만 돋았다 떨어지는 줄 알았더니, 쌓이는 사사로움이 뿌리를 옮기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했던 길고 짧은 대화들을 회상하다 별안간 내 목소리가 어색해진다. 그러다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깨닫고 인정하면서 개운함과 착잡함이 엉킨 한숨이 나온다. 온몸이 바닥에 눌어붙으려 할 때 산뜻함이 필요해진다. 문득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가 생각나 소리를 키워 눈을 감고 듣는다. '나도 몰라, 너도 몰라, 결국엔 아무도 몰라.' 내가 선망하는 그 사람도 나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가사에 엉덩이가 한결 가벼워져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예술이 정치를 포옹하듯이 유머는 가볍게 무거움을 무릎 맡에 안아 올린다. 시간이 지나면 나를 더 알게 되겠지만 난 또 모르는 게 생기겠지. 그럴 땐 근엄해지려는 나에게 개운한 바람이 불도록 부채질을 해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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