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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Jan 04. 2023

초등학생들의 선생님

푸하하

피팅 모델, 수제 햄버거집 종업원, 칵테일바 종업원, 도서관 보조사서, 채점교사... 이것들은 내가 20대의 나이로 서울에 살면서 거쳐온 아르바이트들이다. 젊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아르바이트생이 된다. 나 또한 20대의 절반을 이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일들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면서 몸을 움직여왔다. 모든 아르바이트들은 거의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시작된다. 일을 정할 때에는 시간적 여유, 예상되는 노동의 강도, 명시된 시급 이 세 가지 만을 적절히 고려하면 된다. 3개월만 하고 그만둔 일이든, 1년이 넘게 했던 일이든 그 시작의 무게는 하나같이 깃털마냥 가벼웠다. 모든 노동은 단지 세 가지 요건을 적절히 충족했기 때문에 시작될 뿐이다. 하지만 몸이 그 노동에 적응될 쯤에는 그것이 어떤 일이든 결코 돈을 벌기만을 위한 노동이 아니게 된다. 모든 노동에는 그만의 귀한 기술과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요구를 잘 알아채거나 기분을 적절히 맞춰주는 일들은 고도의 기술이다. 필요한 만큼의 친절과 소통의 정도를 나도 그간의 아르바이트로 배워왔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새롭게 시작한 노동은 내가 그동안에 쌓아온 처세술과 행동양식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나의 아르바이트 인생의 게임 체인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고되고도 유쾌한 노동은 바로 초등학생들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유와 강도와 시급이란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이 노동에 대한 구인 글을 보고 전화로 면접을 본 뒤 첫 출근을 했다. 조그마한 체구에 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아마 이 학원의 원장일, 40대 여성이 나보다도 늦게 들어왔다. 그녀의 왼손에는 스쿠터 헬멧이 들려있었고 오른손 검지로 허공 여기저기를 찌르면서 말했다.


"아유, 제가 빨리 오려고 했는데 1호점에서 계속 일이 늦어져가지고요. 아니, 여기가 2호점인데 오픈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아이들 책도 옮겨 오고 있고. 애들이 여기가 학교랑 더 가까우니까 하나같이 다~ 여기로 오겠다고. 일단 오늘은 몇 명만 올 거라 많이 바쁘진 않을 거예요. 근데 있잖아요..."


인사도, 쉴 새도 없이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여기 원장은 푼수 같은 캐릭터이군'이었다. 그다음 책상에 앉아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어떤 모양새이고 이 학원의 체계는 어떤지 설명을 쭉 들으면서 든 생각은 '학원 운영체계도 원장을 닮았군.'이었다. 분명 1호점이 잘 돼서 2호점을 오픈한 것일 텐데 왜 새로 온 선생을 교육하는 방법이 전혀 갖춰져있지 않은 건지 순수한 궁금증까지 들었다. 다행히 일주일, 이주일 직접 부딪히면서 교재를 지도하는 방법이나 학생들마다 진도가 어떻게 다르고 어떤 교재를 어떻게 준비해둬야 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넘치는 에너지를 가졌음에도 공부에는 단 1%의 에너지도 쓰기 싫어하는 이 발랄하고도 골치 아픈 초등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인지는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푼수 원장에게 했던 질문들은 거의 전부가 이런 식이었다.


"선생님, OO이가 학습지를 너무 하기 싫어하는 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나요?"

"선생님, OO이가 숙제를 며칠 동안 안 해오는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나요?"

"선생님, OO이가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나요?"


푼수 원장은 한 번도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준 적이 없다. 항상 그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특유의 '아휴~'하는 추임새를 뱉으면서 나에게 학생들의 평소 태도를 푸념하며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교실로 걸어간다. 때로는 회유의 말하기로, 때로는 단호한 말하기로 그녀는 초등학생들을 보듬어주고 나무라며 공부를 가르치는 자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싸워서 씩씩 대며 등원하는 자매들을 화해시키고, 허기진 초등학생들을 위한 간식을 준비하고, 학원 기물을 망가뜨린 말썽꾸러기 초등학생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말이다. 혼란스러웠던 점은 같은 사건이라도 그 학생이 누구냐에 따라 그녀의 대응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에게 대답을 해주지 않고 직접 행동하는 그녀를 보고 '나도 대처법을 알아야 호출을 안 할 텐데. 역시 푼수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매번 다른 대응 방식은 내가 초등학생들에게 몇 %로 따뜻함과 따끔함을 조율하며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종 잡을 수가 없게 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어떨 때는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꼭 안아주다가도 어떨 때는 '그건 싸가지 없는 행동이야!'라고 화를 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매뉴얼이 필요했지만 한두 달을 넘어 6개월째 초등학생들을 선생님으로서 마주하면서 결국 그런 것 따위는 여기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노동들에 있던 손님 대응 매뉴얼 같은 것은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쓰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보단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것이었고 심지어 그들 한 명 한 명의 성격과 습관, 가족여행 계획과 치과 가는 날을 알아두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푼수 원장은 언제나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이 노동의 매뉴얼을 나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투정을 인내하고 그들의 거짓말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때에 따라 아주 단호해지는 일이 이 노동의 기술이었다. 그리고 아이들마다의 특유한 각양각색의 매력을 알게 되고 잠시동안 그들의 보호자가 된다는 게 이 노동의 의미였다.



학원에는 초등학생 말고도 몇 명의 중학생들이 있다. 초등학생들의 선생님으로 몇 시간 노동한 뒤에 마주하는 중학생들의 의젓함은 반갑고 놀랍다. 그들도 물론 공부를 하기 싫어하고, 툴툴대고, 가끔씩 꾀를 내기도 하지만 초등학생들에 비하면 그 정도의 게으름을 통제하기란 너무나 쉽다. 한마디로 중학생들은 '말을 잘 듣는다'. 푼수 원장과 내가 설정한 교재의 진도와 매뉴얼에 중학생들은 큰 이탈 없이 곧잘 들어맞는다. 무엇보다 우리는 가끔 중학생들을 타박할 필요는 있어도 그들을 안아주거나 화를 낼 필요는 없다.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생의 나이 차이는 고작 3-4살 정도일 텐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적당히 떠들고 적당히 공부하는 이 의젓한 중학생들도 몇 년 전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고뭉치로 숱한 선생님들의 골치를 아프게 했을까? 그 짧은 해 동안 이들 내면의 시끌벅적하고 푸하하 웃는 초등학생들이 어디로 가버린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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