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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Dec 03. 2021

위로의 재료

솟아올라 뚝뚝 떨어지는


위로는 너무 어렵다. 몇 마디 말로 그 사람의 슬픔을 덜어준다는 건 기적을 행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오히려 곧장 해결책을 제시하는 유형의 사람이 나다. 어떤 것이 힘들다면, 이렇게 해보면 어떻냐는 식의 말을 위로랍시고 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



나에게 위로가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사람의 중요한 생각의 기둥을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인지, 어떤 부분을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등 말이다. 아니면 위로까지 가기 전에 질문들이 터져 나온다. 그러면 그날 위로는 이미 망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다음은, 위로의 순간에 그 사람의 이야기에 아주 몰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장소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끄러운 술집에서 하는 위로가 마음을 더 찝찝하게 하는 이유이다. 둘 다 대화에 원활히 임할 수 있는 환경과 컨디션이 준비되어야 한다. 이렇듯 위로는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그 사람을 향해 막힘없이 향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그 사람의 슬픔에 닿고 싶은지가 '괜찮은 위로'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준비물일 것이다. 그런데, 위로에 젬병인 나도 살면서 한 순간 이 마음이 위로의 마음이라는 걸 적확하게 느낀 적이 있다. 내가 지금 느끼는 바로 이 감정이 위로와 가장 닮아있는 감정이라고 말이다. 그 위로의 상대는 엄마였다.



그날 우리 둘은 CGV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본가에 갈 때면 꼭 한 두 번씩은 부모님과 술을 마시는 시간을 갖는다. 소중하고 재미있는 시간이면서도 무엇인가 가슴 불편하게 울적하다. 어김없이 그날도 집에 있던 모건 데이비드 와인을 꺼내 주방 옆에 있는 작은 식탁에 앉았다. 짙은 우드톤의 작은 식탁 위엔 엄마가 만들어 놓은 식탁보가 언제나 깔려있다. 그 위에서 고모가 직접 만들어주신 떡볶이를 안주로 함께 먹었다. 그날 본 영화는 고객을 위해 세트를 꾸며 잠시 동안 가상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스토리의 영화였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와인과 떡볶이라는 이 묘한 퓨전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한 번도 내가 아주 어릴 적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웬만한 이야기를 모두 공유하는 사이여서 이따금씩 내가 물어볼 때도 있었지만, 엄마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데, 과거를 여행해서 첫사랑을 만난다는 뻔하고 아름다운 그 영화 때문일까, 아니면 10시가 넘은 밤, 식탁 위 주황빛 조명 하나만을 켜 둔 분위기 때문일까, 엄마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길게 해 주었다. 왜 엄마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외할머니와의 시간들을 엄마는 어떻게 해석하며 살아왔는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펑펑, 정말 펑펑 울었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엄마라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내 앞에서 이렇게 목 놓아 우는 걸 살면서 또 볼 수 있을까 싶게, 그렇게 터질 것 같이 울었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아픔을 느껴본 적이 없다. 상상만으로는 엄마가 느낀 아픔의 반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느낀 건 엄마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엄마의 그 시간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의 근거가 뭔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연결되어 있다'라는 느낌이 온몸에 닿았다. 너무 이 사람을 아낀다는 느낌,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느낌, 그 전에는 엄마에게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하고 파란 감정이 강하게 쓸려왔다. 말도 안 되게 나도 눈물이 나왔다. 펑펑 우는 엄마 앞에서 주르륵 울었다. 눈물이 나오는 순간 놀랐고 신기했다. 내가 진심으로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엄마의 표정, 뒤에 보이는 벽지 모양, 식탁에 놓인 식탁보, 조명의 빛깔 같은 모든 걸 다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 5월, 일기를 쓰면서 영원히 잊지 않고 싶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스친다. 엄마에게도 그 순간이 위로였는지 모르겠다. 내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위로를 해 본 경험이 사실 내 오산은 아닐까. 우리가 어떤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받는다'라는 표현을 하는 걸 보면, 사실 위로는 하는 사람보다는 받는 사람의 입장이 더 중요한 일인 것 같다. 그도 그럴게, '위로를 준다'라는 말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왠지 나처럼 위로를 잘 못하는 사람이나 할 것 같은 말이다.



아, 내 이야기는 너무 내 중심적이었다. 위로는 뱉는 순간 내 손을 떠난다.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감정에 대한 다른 언어가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솟아올라 뚝뚝 떨어지는, 고요하고 광활한 그 감정은 사실 원래부터 내게 존재했던 사랑인지 모른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위로할 순 없을 거다. 나로 인해 그 사람의 슬픔이 조금은 덜어졌는지, 내가 정말 따뜻한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기에.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진심이라면, 앞으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내 진심이 불어나 폭신하고 부드러운 표면으로 그 마음에 닿고 싶은 마음은 여기에 존재할 테니. 고요하고 광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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