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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Mar 11. 2022

동네의 미학

걸음으로 충분한 삶


가만히 내가 사는 집을 떠올려본다. 작업공간, 침실, 부엌, 드레스룸이 나눠져 있는 듯 경계가 모호한 나의 집.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수도권 주택부족 문제와 1인 가구의 증가 추세에, 건설업계와 부동산업계가 합작한 쩜오룸(1.5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곤 곧 그 상상 위에 다른 장면들이 스며든다. 집들이 겸 모여서 서로 사는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과 같이 먹던 우롱 칵테일, 유튜브로 고군분투하며 배웠던 갖가지 요리들, 아침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서 독서로 정신을 깨우던 비몽사몽 한 시간들. 나의 물리적인 집은 방이 하나 딸린 그리 좋지도 그리 나쁘지도 않은 집이지만 그 위에 몇 겹으로 겹쳐지는 기억들이 집의 크기를 몇 배 이상으로 키워놓는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현관 자동문이 열리면 나오는 건물 아래 쭉 뻗은 길도 떠오른다. 그 내리막을 내려오면 있는 5분 거리의 친환경주의 카페와, 3개월에 8만 원이라는 놀랍게 저렴한 우리 동네 헬스장도 빼먹을 수 없다. 카페에서 일주일에 두 번 픽업해오는 샐러드와, 저렴한 데다 시설도 좋은 헬스장은 이제 내 삶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루틴이다.



집을 떠올리다가 점점 동네까지 생각이 닿는다. 좋은 동네와 걸음으로 충분한 삶에 대한 어떤 꿈이 있는 나에게 지금 동네는 커다란 거실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아, 집중 잘 되는 깨끗한 도서관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이사 온 인상 좋은 닭강정 가게 사장님도 빼먹을 수 없지. 그럼에도 나의 동네의 미학이 있다면 작은 중앙 광장의 벤치와 햇살 좋은 날 특히 아름다운 붉은색 벽돌이 제일 첫장에 적혀있을 것이다.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욕망이 쌓이고 쌓여 어디론가 멀리 떠나지 않고선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마음을 잘 안다. 그럴 때 떠나지 못하면 인간은 고장이 난다. 머무름과 떠남은 밤의 숙면과 낮의 활기처럼 삶에서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될 순환같다. 누구에게나 떠날 곳과 돌아올 곳은 필요하기 마련. 행여 꼭 돌아오지 않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곳은 마음속에 한 곳 있어야 한다.



이 이동의 시대에 하루 만에도 몸은 저 멀리까지 간다. 나 또한 매일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서 어디론가 실어졌다 실어져 오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그 끝에는 똑같이 돌아오는 방과 동네가 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여유 있는 날에는 어떤 교통수단도 타지 않으려 한다. 넓은 거실 겸 동네는 그렇게 한 번씩 걸으면서 즐겨줘야 하기 때문에. 나의 동네의 미학을 배우기 위해선 걸음으로 배우는 수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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