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이 아니라 매주라구요.
앞선 이야기
장인어른, 아내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
장인어른은 26세, 어린 나이에 결혼하셨고 그다음 해 아내가 태어났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동갑이시며 그야말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계신다. 아내는 그런 장인장모님을 보고 자랐고 동갑의 남자와 일찍 결혼하여 부모님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26~28살 되면 결혼해야지 했는데 딱 그 나이에 10살 많은 내가 나타났고 결혼하자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나에게 넘어가 결혼하고 말았다. (아내는 나한테 반보쌈 당했다고 합니다...억울)
처음 아내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 어떤 남자와 둘이서 찍은 사진이 있는 걸 보았는데 나는 남자친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보니 아버지라는 걸 알았다. 그 정도로 장인어른은 젊으시다.
장인어른은 나보다 16살 많다.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니
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딱 그 나이인데?!
또래의 장인어른은 대부분 아버지 뻘인데 나는 형님 뻘이라는 거다.
재밌는 건 장인어른과 내 아버지 나이 차이도 16살 차이라는 것이다. 참 기막힌 우연이다. 나-장인어른-아버지 16살씩 차이가 나는 이런 시추에이션.
장인어른은 성인군자 같은 분이다.
연애시절부터 아내에게 장인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딸들이 어딜 가거나 집으로 올 때가 되면 꼭 데리러 가신다. 본인도 고단하고 피곤할 텐데도 데리러 가신다. 말로 표현은 잘하지 않으시지만 행동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설거지와 집 청소는 물론, 분리수거도 대부분 장인어른이 하시고 주말은 항상 가족과 함께 한다. 약속은 업무적인 일 외에는 잡지 않으신다. 이런 장인어른의 모습들을 보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면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처음엔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내에 대해 조금 걱정이 되었다.
만약 내가 장인어른만큼 못 해주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내와의 연애 때 차가 없는 내가, 데이트를 위해 렌트를 하겠다고 하니
버스 타고 가면 되는데 왜 차를 렌트해요?
라고 되물었다.
장인어른이 매번 딸들이 어딜 가나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했기에 차 없는 데이트가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내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이때 나는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신으로 찼다.
장인장모님을 처음 뵙고 난 그다음 주, 장인어른은 나에게 한번 보자며 술집으로 부르셨다.
처음으로 장인어른과 독대했다. 처음 뵙던 날은 무섭게 나를 보시더니 그날은 온화하게 대해주셨다. 여러 대화를 했는데 나에게 두 가지 당부를 하셨다.
첫 번째는 '야', '너' 같은 호칭을 쓰지 말게
두 번째는 '처'라는 말은 하지 말게
부부간의 존중은 말로부터 시작되는데 서로 '야'나 '너'라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셨다. 두 번째는 '처먹는다' 같은 상대를 비하하는 말을 뜻했다. 나에게 당신의 딸을 보내면서 사위에게 하는 당부라고 생각했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내에게 '야, 너'라고 불러본 적이 없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다투더라도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처'는 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부는 서로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하기도 한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은 다른 부분이 많다.
서로의 장단점이 있지만 어쨌건 나의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기에 나는 절대 이혼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옆에 있으므로 나는 배울 점들이 정말 많다. 처가식구들과 식사를 하면 장인어른은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신다. 나는 항상 장인어른의 말씀을 귀기울여듣는다. 그리고 그것을 꼭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장인어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 만약 내가 딸이 있는데 딸이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을 때의 기분은 어떨까?
정말 매의 눈으로 어떤 놈인지 파악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 아버님을 뵙던 날 나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나 같으면 폭풍 질문을 퍼부었을 것 같다.
- 딸의 결혼식 날, 평생 잡던 딸의 손을 다른 놈에게 건네줄 때의 기분은 어떨까?
나는 그 자리에서 폭풍 눈물을 쏟을 것 같다. 아니 못 줄 것 같다. 내 소중한 딸...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할 텐데... 이런 마음으로 가득할 것 같다.
- 딸이 그 남자와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이 아닌 독립하여 저 멀리 가서 산다면?
온갖 걱정이 다 될 것 같다. 별일은 없는지 적응은 잘하고 있을지 싸우지는 않을지. 그저 내 딸을 데리고 간 그놈을 믿을 수밖에 없다. 행복하게 해 주길...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뿐 일 것 같다. 장모님도 똑같은 마음이리라.
아내는 부모님께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다.
자주 전화드려라고 하지만 아내는 조금 어색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전화를 드리는 경우도 많다. 사실 나 또한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화를 드리는 것과 드리지 않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기에 드릴 말씀이 없어도 전화를 한 번씩 드렸다.
결혼하여 서울로 가는 우리와의 식사 자리에서 아버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결혼하고 나면 자주 보기 힘들겠지...
저희가 자주 오겠습니다 아버님.
그게 쉽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아내를 친정에 보냈다. 장인장모님이 워낙 손주를 보고 싶어 하셨기에 아이와 함께 내려가기도 하고 아내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혼자 보내기도 했다. 물론 세 명이서 함께 갈 때도 있었다.
아내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수도권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다행히 내가 백수였기에 강의나 교육을 들으러 가는 날 외에는 항상 집에 있었지만 아내도 심심했을 것이고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백수생활동안 쉬지 않고 일했기에 (정말 백수가 과로사할 뻔했어요) 나는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게 되었고 아내는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고 있으니 취직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1년 동안 적은 돈으로 잘 버텨준 아내에게 감사했고 나는 고민을 하다 수도권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취직자리를 알아보았고 10년간 쌓아온 경력과는 다른 업종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1년 간 해온 일들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우리는 고향으로 내려가 앞으로 우리가 살 집을 알아보았다.
나는 처음부터 아내에게 이야기했었다.
만약에 내가 고향에 취직이 되면 장인장모님 옆에 살자.
최종적으로 취직이 되었고 장인장모님 댁에서 회사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그건 나만 고생하면 된다. 집을 보러 간 날, 장인어른도 우리와 함께 집을 보았다. 나와 아내는 햇볕이 잘 들어오는 괜찮은 집을 하나 보았고 이 집이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장인장모님 댁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자 장인어른은
집에서 걸어서 30분이면 거리가 너무 멀다...
라고 하셨다.
아내는 나중에 나에게 와서는
아니, 우리가 살집인데 아빠가 왜 멀다 그러는 거지?
라며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나는 결코 웃으며 넘기지 않았다.
몇 개의 집을 더 보았고 마지막으로 본 집이 여러모로 괜찮았다.
평수는 그전에 마음에 들었던 집보다는 조금 작고 단지도 작았지만 무엇보다 집 거실에서 장인장모님 댁이 바로 보였고 걸어서 3분 거리였다. 나는 아내에게 마음에 드는지 의견을 물어보았고 아내도 괜찮다고 하길래 바로 계약을 진행했다. 아버님도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셨다.
자주 못 보겠지라며 아쉬움을 드러내셨던 아버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주 뵙겠다고 말씀드린 그 말을 꼭 지키려고 노력했고 장인장모님 집 근처로 이사 가면서 그 약속을 지켰다. 장인어른은 매일 퇴근하면 손주가 보고 싶다며 아내에게 집으로 오라고 하신다.
나는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장인어른과 밖에서 만나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장인어른과 나 그리고 우리 아이는 매주 주말이 되면 셋이서 함께 목욕탕을 간다.
나의 인생의 목표이자 꿈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
그 롤모델은 두말할 것 없이 장인어른이고 그런 장인어른의 옆에서 매일매일 배우고 있다.
아버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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