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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Jun 05. 2023

부사장에서 회장으로, 팀장에서 대표로

내가 모신 두 분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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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창궐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중국에서 직원들이 회사에 출근하지 못해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매일 아침 Zoom을 켜놓고 일하게 되었다. 중국인 직원들은 각자 잠옷을 입고 화장끼 없는 얼굴로 아주 편하게(한국이라면 어땠을까?) Zoom 앞에 앉아 일을 했다. 한국에 있으면서 그다지 터치받지 않았던 나였지만 Zoom으로 일하게 되면서 나도 회의에 무조건 참가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중국으로의 출장(?) 이 어려워졌다.

중국의 봉쇄 정책이 완화되고 직원들이 회사에는 출근했지만 중국으로 입국과 출국이 어려워졌다. 그로 인해 나는 모든 일을 영상통화로 진행했고 필요한 제품들은 모두 국제택배로 보내야 했다. 일에 차질이 생기거나 어려움은 없었지만 어쨌든 중국에 직접 가지 못함으로써 내가 할 업무를 대신할 사람에게 자료를 만들어 넘기는 작업들이 많아졌다.


중국에서 심각했던 코로나는 한국에서도 심각한 상황이 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는 예전의 메르스처럼 한때 유행하는 감기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한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그리고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그의 동선이 뉴스에 뜨고 그 시간대에 확진자와 동선이 겹쳤던 이들이 따로 마련된 격리소에 격리되기도 했다. 당시에는 '걸리면 사망' 정도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확진자가 되지 않기 위해 다들 조심스러웠다. 바깥에서는 끼고 다녔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좀 느슨했던 마스크 착용이 더욱 강화되면서 어딜 가나 착용하게 되었고 집이 아닌 모든 공간에서 착용해야 하는 이 답답함은 모든 이들을 힘들게 했다. 지하철이나 대중교통에서 마스크 착용으로 인한 다툼도 많이 일어났다. 식당에 가면 입구에서 방문시간, 이름, 휴대폰 번호를 기입해야 했고 식당이나 술집은 9시 이후로 영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자영업자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회사의 매출이 떨어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대면하는 것을 피하게 되었고 대부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 한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 와중에 나는 한국에서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 (정확히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이었다)

운명의 여자를 만나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쫓아다녔다.


처음 아내를(당시에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알게 되었을 땐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의 시기였고 연장된 파견기간 마저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자신 보다 10살이나 많은 사람인 데다 곧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있는 나를 이런저런 이유로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중국 본사에서 나에게 파견기간을 1년 더 연장하겠다고 했다.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회사 차원에서도 내가 한국에 있는 것이 매출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나는 총 2년 동안 한국에 파견되어 있었고 아내의 마음을 얻을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쫓아다닌 끝에 아내의 마음을 얻었고 (당시 예비) 장인, 장모님으로부터 결혼에 대한 승낙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중국에 가는 것은 좋으나 1년간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갔으면 좋겠네.


회사에서는 내가 홀로 맡고 있던 카테고리의 매출이 커지자 나 홀로 일하던 이 카테고리를 팀으로 확대할 계획을 가지고 사람을 뽑고 있었고 나를 중국으로 복귀시키려고 했다. 물론 당시 코로나가 심각했기에 중국으로 돌아오라고 하기가 쉽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그 결정이 빨리 나야 한국에서 신혼집을 구할 수 있었는데(만약 돌아가야 한다면 그 시점에서 4개월 정도 뒤에 중국으로 가야 했다) 결정을 내려주지 않으니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도 신혼집을 못 구하고 있었다. 만약 코로나가 완화된다면 나는 결혼식 후 약 2개월 뒤에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러면 장인, 장모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나는 결정을 해야 했다. 중국으로의 복귀냐, 장인장모님과의 약속이냐.


나는 두 분의 부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10년간 일한 정든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한국으로 파견 오게 되면서 내가 맡은 카테고리가 더 승승장구하여 팀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여러모로 아쉬웠지만 결혼을 통해 나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됨으로 후회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중국에서 상무님으로부터 엄청난 소식이 들려왔다.


대표님이 회사를 그만두신다.


10년을 함께 한 대표님이 승승장구하는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셨고 그 이유인즉 더 좋은 기회로 주주가 되어 신규 브랜드를 런칭하기 위해 나가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회장'이라는 직함으로 가는 자리였다. 축하드릴 일이었다. 다만, 현재 브랜드의 인원 중에 비서를 제외한 인원은 1년간 아무도 데리고 가지 못한다는 그룹과의 약속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송별회조차 하지 못했고 나 또한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도, 만나 뵐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전화로 응원하는 마음을 전했다.


딱 10년이 되었구나. 그동안 너도 고생 많았다.


중국에서 함께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10년이 지난 시점, 대표님은 그룹을 떠났다. 

그리고, 나도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상무님께 나의 결혼으로 인해 퇴사해야 되는 상황을 전했다.

언제나 친형처럼 나를 대해주시던 상무님은 나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 주셨고 퇴사를 승인하셨다.


그렇게 나는 10년간 일했던 정든 그룹을 떠나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다.


중국에서 내가 몸 담았던 그룹은 정말 비전 있는 회사였다.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며 여러 브랜드를 인수하여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나는 그룹을 떠남과 동시에 중국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중문과를 선택하여 중국에 대해 공부하고 중국 회사에 입사하여 10년간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었다. 내가 꿈꾸었던 '중국通'의 꿈은 어쩌면 절반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대표님과 내가 떠난 뒤 상무님은 1년 뒤에 퇴사했고 대표님이 계신 회사로 갔다.

상무님은 그 회사의 부사장이 되었다. 나와 처음 함께 일을 시작했던 두 분은 부사장에서 회장이 되었고 팀장에서 부사장이 되었다. 11년 만의 일이다. 그 사이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내가 출산하게 되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위해 이직한 회사를 퇴사하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며 고군분투했다. 육아는 차라리 회사를 다니는 게 낫다 싶을 만큼 힘들었다. 내가 회사를 다녔다면 아무도 없는 먼 타지에서 아내 홀로 집에서 육아를 했을 텐데 그래도 내가 함께 해서 서로 아이의 성장을 보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약 1년간의 휴직기 끝에 취직 자리를 알아보았다.

아내를 위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고 내가 지금까지 일했던 업계와 전혀 다른 쪽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집은 처갓집에서 걸어서 5분, 거실 창밖으로 장인, 장모님 댁이 바로 보일 정도의 거리지만 출근 1시간 반, 왕복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에 이사를 왔다. 서울에서는 출근 한 시간 반 정도는 기본이지만 이곳에서 편도에 한 시간 반은 다들 '미쳤다'라고 하는 거리다.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내 가족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이다.


정든 회사를 퇴사한 지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두 분은 새로운 브랜드에서 함께 일하다 대표님(나와 일할 때는 대표님이었기에 대표님이라 칭함)은 또 더 큰 기회를 얻어 유명한 글로벌 브랜드의 회장으로 가게 되셨다. 그러면서 대표님은 회사 대표직을 상무님(새로운 브랜드에서는 부사장)에게 넘기고 갔다. 내가 막내 때부터 모셨던 부사장님은 회장이 되셨고, 팀장님은 대표가 된 것이다.


그 소식이 들린 지 얼마 안 되어 중국의 입국 제재가 완화되었고, 나는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 코로나 창궐 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으로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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