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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Jun 08. 2023

내 청춘의 증거

20대 후반이었던 내가 40대가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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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이 되신 대표님은 결국 만나 뵙지 못했다.


대표님은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웠다. 코로나 시기, 대표님께서 잠깐 한국에 머무르셨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아내(당시는 결혼하기 전)를 데리고 서울에 가 결혼할 사람이라며 대표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때 대표님을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중국에서 13년 전, 함께 했던 이들은 대부분 잘되어 억대 연봉을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한 회사의 임원이 되어 있고 막내였던 직원도 팀장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자랑스럽다. 중국에 방문하면서 코로나로 인해 작별인사를 제대로 못 나눈 이들과 이제는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마침표를 제대로 찍은 느낌이랄까.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그들과 달리 나는 결혼하면서 한국으로 이직하게 되었고 또 퇴사하게 되면서 1년을 쉬었다.

내가 있던 업계는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나는 복잡한 서울에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고향에 내려와 전혀 다른 업계에서 일하게 되면서 연봉이 중국에 있을 때 비해 거의 절반 가까이 줄었다. 다른 업계인 데다 지방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선택이었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있다.

대학생 때 남들 스펙 쌓던 시절, 중국이라는 한 우물만 파며 중국 대기업에 취직했듯 지금 나의 이 선택도 어떤 미래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봉이 높을 때는 원 없이 여행을 갔고 아내와 연애시절 사주고 싶은 것들을 다 사주었지만 이제는 안정적으로 나의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연봉은 줄었지만 나의 행복지수는 높다.


코로나 이후 개인적인 일처리를 위해 중국으로 가야 했을 때, 나는 솔직히 중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한국 생활에 너무 젖어 있어 중국에 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느끼는 불편함들을 너무 오랜만에 마주해야 하는 것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에 도착하여 공항 밖으로 나오는 순간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나를 반겨주는 친구와 동료들 그리고 형 같은, 이제는 대표님이 된 팀장님까지. 익숙했던 길, 익숙했던 풍경 그 모든 것들이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내 청춘의 증거였다.

중국에서의 지난 10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왜인지 눈물이 났다. 군대를 전역하던 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2년간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 눈물을 흘렀던 것처럼, 나의 지난 중국에서의 10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두 분을 만난 건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며,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두 분을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힘든 적도 많았지만 지나고 나니 오히려 힘들었던 일들이 더 깊은 추억이 되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또 그때 힘들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그때 좀 더 잘할걸 하는 후회도 많이 든다. 두 분께 더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도 든다.


돌이켜보면 나의 10년은 대표님에 의해 내 인생자체가 좌지우지되었다.

내가 중국에 취직한 것도, 기획자가 된 것도, 좋은 브랜드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의 대도시에서 살았던 것도, 한국으로 파견 온 것도 그리고 파견 온 한국에서 운명의 여자를 만나게 된 것도 어쩌면 모두 대표님에 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런 대표님은 나에게 있어 '사회에서의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무명이었던 축구 선수 박지성을 국가대표팀에 차출하고 2002년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보이며 유럽 최고의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가기까지 히딩크 감독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젠 함께 일하지 않지만 10년을 나를 보살펴 주신 대표님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대표님,

13년 전, 대학을 갓 졸업했던 부족한 저를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부족한 게 많았지만 대표님은 언제나 저에게 많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겉으로는 엄하게 대하셨고 다른 직원들보다 훨씬 더 질책하셨고 이해가 안 될 만큼 저를 크게 혼내기도 하셨지만 항상 뒤에서 저를 챙겨주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나고 나니 대표님이 저를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더 잘하라는 뜻으로 남들보다 더 엄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저 또한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런 대표님을 저는 '사회에서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대표님이 얼마나 좋은 리더였으며 대표님께서 이루신 업적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남자 셋이서 함께 살며 쉬는 날 없이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여 밤 11시까지 일했던 그때가 참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추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일했던 브랜드가 이제는 조 단위의 매출을 내고 있으니 그저 뿌듯할 따름입니다.


막내 때부터 모셨다 보니 여전히 대표님을 대하기가 어려워 아주 가끔 연락드리기는 하지만, 항상 대표님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20대의 신입사원이었던 저는 이제 40대가 됩니다.

40대였던 대표님이 이제 60대가 되셨으니 세월이 참 많이 지났습니다. 그런 만큼 건강에 유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듯, 술은 좀 적게 드시고 운동을 좀 더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마지막 인사는 13년 전부터 지금까지 매번 같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 대표님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동동몬 올림.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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