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오늘도 수고했다는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 어떠한 서로의 터치 없이 가벼운 손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그때 장난으로라도 그의 손끝을 만져보려 하지 않은 게 어찌나 다행인지.
손 흔들고 헤어지며 몸을 돌리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
아빠였다.
우리가 이토록 이상한 관계를 이어가게 만든 장본인. 손끝이 닿을락 말락 바로 앞에서 포옹 한번 하지 못하게 애틋하게 만든 장본인. 바로 그 장본인인 아빠를 눈앞에서 마주친 것이다.
우리 부모님도 어느 정도 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다. 딸이 다른 날도 아닌 크리스마스이브날 꽃다발을 받아가지고 집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꽃의 출처에 대해 이미 들으신 상태였다. 그 이후 내가 별다른 이야기도, 데이트를 하러 가는 것 같은 행색도 없었으니 굳이 부모님도 나의 연애 여부에 대해서 묻지 않으셨을 뿐이었다.
하지만 연륜으로 알고 계셨을까. 야밤에 공부하고 돌아오는 딸내미와 애틋한 인사를 나누고 있는 이 사내가 누구일지 말이다.
한껏 미간을 찌푸리시며 그를 쳐다볼 줄만 알았는데, 딸바보 아빠는 생각보다 여유롭고도 나긋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셨다.
"세잎이(필명) 친구인가 보네. 집까지 다시 가려면 힘들 텐데 잠깐 올라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요."
예상치 못한 집 방문이었다.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는 양쪽으로 우리 엄마아빠에게 떠밀리듯 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었다.
그렇게 그날 아빠는 나와 그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고,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빠와 그는 대화를 나누었다. 임용고시 준비하는 딸이 연애라니, 무조건 반대하실 줄만 알았던 아빠였다. 사실 꽃다발을 받아온 후로 그의 존재에 대해 은근슬쩍 얘기를 꺼내볼 때만 해도 별로 탐탁해하시지 않는 듯 보였었다. 꼭 그라서가 아니라 그저 이 시기의 딸의 연애가 탐탁지 않았을 수도.
그런데 직접 당사자와 이야기를 해보니 아빠의 마음이 동한건지, 내가 그의 진심에 넘어갔듯이 아빠 또한 그의 진심을 보았던 건지, 긴장 가득했던 예기치 못한 만남의 시간은 정말이지 순조롭고도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와 나의 관계를 듣고도 전혀 반대하시지 않고 오히려 응원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딸내미를 손끝하나 만지지 않고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6개월 동안 지키고 있었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날의 예기치 못한 방문은 우리 관계에 크나큰 의미를 남기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께 허락받기 전까지 나의 손끝하나 만지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가 드디어 끝을 맺게 된 것이고, 이제 우리도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빠를 구워삶은 건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양파 같은 매력이 나오는 사람인건지.
보수적인 딸바보 아빠로부터 고시 공부하는 딸내미의 연애를 허락받게 하다니 말이다.
그 후로 그는 변함없이 평상시처럼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달라진 일이라고는 그전에는 그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혼자 다시 버스정류장까지 되짚어가야 했다면, 이제는 그 돌아가는 길이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종종 산책하고 계시던 우리 부모님과 만나면 부모님께서 그와 함께 다시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가주셨다. 일부러 이때쯤이면 세잎이와 ○○이가 올때가 됐는데 하고 나와계셨을수도.
"그냥 세잎이 혼자 가게 하면 되는데 힘들게 늘 여기까지 바래다주고..... 고맙고 미안해요.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가요. 우리가 버스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줄게."
그날 이후로, 그는 나와 헤어진 후 늘 혼자 되짚어 걸어가던 길을 나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함께 걸어갔고, 늘 혼자 기다리던 버스를 우리와 함께 기다렸으며, 우리들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지금도 그 길이 잊히질 않는다. 버스정류장에서 우리 집 아파트까지 걸어오는 그 길 말이다.
그가 나를 위해 같이 걸어가던 그 길, 나의 부모님이 그를 위해 같이 걸어가던 그 길.
그 길 가운데 주고받은 대화가 길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리라. 헤어짐의 인사가, 안녕이라는 말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음을.
나와 나의 부모님 그리고 그, 이렇게 우리 넷은 밤마다 정겹고도 애틋한 고마움의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