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참 손 한번 잡기 어렵네

이런 사람 처음 봅니다

by 세잎

지금까지 봐왔던 여느 남자들과 너무 달랐다.


2년간 짝사랑해 온 여자로부터 당신의 고백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을 들으면 좋아서 날뛰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고백 보류라니. 거기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모님과의 관계까지 생각해 주다니 말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과의 신뢰관계를 쌓아가기 위해 지금껏 부모님도 알지 못하는 나의 피나는 노력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노력을 한순간에 깨뜨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비록 자신이 기다려온 2년의 시간에 대한 승낙을 받았을지라도 말이다.


그는 내가 힘겹게 쌓아온 부모님과의 신뢰관계를 지켜주기 위해서 연인의 상징인 스킨십을 일절 하지 않겠다 선언했다. 대신 나의 고시생활 중에 남자친구 그 이상으로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해주겠다고. 그리고 본인도 더욱 나의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아.. 이것도 연애라고 해야 하나. 연애다 아니다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관계가 시작이 되었다.




그는 정말로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부모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더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나 또한 더 열심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고 때로는 서로의 동기부여가 되고 때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곳이 되어주었다. 그는 나의 자존감 지킴이가 되어주며 끊임없이 내가 '잘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덕분에 나의 고시 생활은 전혀 외롭지도, 전혀 슬프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생기 있고도 희망 가득했다.


그 사이에 그는 다시 회사생활을 하였고, 내가 도서관 가는 날이면 도서관으로, 노량진 학원에 가는 날이면 노량진으로 날 데리러 와주었다. 회사에 가지 않는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는 도서관 내 옆자리를 지켜주며 문 닫는 시간까지 늘 함께해 주었다.


우리의 데이트라고는 도서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짧은 식사 시간이었으며, 도서관이 문 닫는 시간이나 노량진 학원이 끝나는 시간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대중교통 이용 시간뿐이었다.


그는 나의 고시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딱 그 시간에만 나를 만나러 와주었고 그때마다 하루종일 공부하느라 지쳐있던 내 이야기를 쉼 없이 들어주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이고 노량진이고 찾아와 늦은 밤 외롭지 않게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그 덕분에 임용고시 공부하는 1년 동안 집에 가는 길에는 책가방을 들 일이 거의 없었다.


전공서적으로 꽉꽉 들어찬 무거운 가방으로부터 내 어깨가 쉴 수 있도록 그는 매일같이 내 가방을 들어주러 와주었고, 하루종일 공부만 하느라 누구와 대화 한번 하지 못했을 내가 쉼 없이 수다를 떨 수 있도록,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는 늘 나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남들처럼 영화를 보거나 예쁜 꽃구경을 가는 데이트가 아니라 할지라도

집으로 돌아가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이 영화보다도 재미있었고

대중교통을 타고 발맞추어 걸어가는 그 짧은 길이 꽃구경만치 설레고 아름다웠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정말 단 한순간도 내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을 보며 그의 진심과, 한결같음에 그가 더욱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히려 '손 잡는 정도 괜찮지 뭐. 우리가 애도 아니고~' 하는 마음에 몇 번이고 그의 손을 건드려 보며 유혹 아닌 유혹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겠다며 자신의 손과 내 손을 지켜냈다. 가끔은 주먹을 쥐며 자신의 손을 원천봉쇄하기도 하고, 유혹에 넘어올 뻔할 때는 본인의 허벅지를 내리치기도 하며 끝까지 약속을 지켜냈다. 정말 힘들 때는 자기가 죽을 힘을 다해 참고 있으니 도와달라며 하소연하기도.


'거참. 손 한번 잡기 어렵네.'


남자의 약속은 원래 이렇게 무거운 것인가. 그동안 내가 한없이 가벼운 사람들만 봐왔던 것인가. 그렇게 나 역시 그의 손 한번 잡아보기를 포기하려던 찰나.


그날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어느 날. 어김없이 노량진 학원 수업이 끝나고 그가 나를 데리러 와주었고, 버스에서 내려 우리 집 앞까지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고 아쉬운 마음 가득하게 집 앞까지 도착했다. 오늘도 고생했다며 서로 아쉬움 가득한 인사를 건네고 있는데,


그런데 그때, 어디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세잎아!(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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