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키 작은 키다리 아저씨는 2년의 짝사랑 후 나에게 고백을 했고, 6개월의 스킨십 금지 기간을 거쳐 나와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알았을까.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줄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남자와 결혼을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를 만나는 동안 문득문득 떠올랐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결혼대상을 만나면 종이 울리고 눈앞에서 새하얀 빛이 세상을 밝게 비춰준다고.
경건한 종소리도, 새하얀 빛도 없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연애를 갓 시작한 순간부터 난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꼭 그럴 것만 같았다.
그는 나에게 고백할 때부터 '이 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에게 고백했다고 했다. 그의 강한 갈망(?)이 나에게도 느껴져서인지 나 역시 그만 보면 나의 마지막 남자라는 생각이 그렇게도 강렬하게 들었었나 보다.
그는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냐면, 나에게 고백하기 전 그의 부모님(지금의 시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결혼할 여자가 생겼어요.
연애도 시작하기 전에, 내가 그의 고백을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결혼대상을 발표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참 황당하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나를 좋게 봐주고 나에 대한 확신을 가져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아들이 연애도 시작하기 전인데 갑자기 결혼 발표처럼 이야기해서 그때 참 놀라셨지요^^;; )
내가 그를 결혼 대상자로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자상함과 다정함, 처음 고백받았을 때 그에게서 느꼈던 높은 자존감. 이런 성격적인 요소는 기본으로 하고 그 외의 요소들을 생각해 보았다.
1. 신뢰할 수 있는 남자.
가장 첫 번째로 나를 움직인 부분이다. 부모님께 허락받기 전까지는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무려 180일, 6개월이나 지킨 남자, 숱한 나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의 손끝을 지켜낸 남자였다.
자신이 처음 내뱉은 말, 나와 한 약속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의 마음에서 강한 신뢰가 느껴졌다. 연애도 연애지만 결혼이야말로 부부간의 신뢰가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2.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먼저 변화하고 성장하는 남자.
나 역시 그 당시 연애를 한다면 대학생때 하던 연애와는 달리, 이제는 결혼을 목적으로 한 진지한 만남을 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면서 소위 '배우자기도'라는 것을 했었는데, 나의 배우자 기도는 '어떤 배우자를 보내주세요.' 하는 배우자 기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하나님께서 절 위해 정말 멋진 사람을 예비하고 계실 텐데 전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에 걸맞게 제가 먼저 멋진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제가 먼저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이러한 내용의 기도였다.
그때만 해도 상대를 위해 나 자신이 먼저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지 않나. 시도 때도 없이 상대의 부족함을 먼저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말이다. 내가 먼저 상대를 위해 바꾼다는 것,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그것을 그는 날 위해 기꺼이 해주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외적인 측면의 한 사례로, 예전부터 나는 우스갯소리로 어깨 넓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었다. 그는 나의 그 말을 듣고 '어깨 넓은 남자? 뭐 공유? 공유 같은 남자가 세상에 어딨어?' 하고 나에게 면박을 주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깨가 넓어진다는 수영을 배우기 위해 그저 말없이 다음날 바로 새벽 수영 수업을 끊어서 주 3회 꾸준히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4년의 연애동안 단 한 번도 나의 모습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나의 모난 모습들 까지,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예뻐해 주었다. 그의 모습에 나 역시 그를 더욱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었다.
3. 한결같은 정성
6개월의 스킨십 금지 기간이 끝나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후로도 우리는 4년의 연애를 이어갔다. 네 번의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나도 그렇고 그도 그렇고 우리는 특별한 이벤트보다는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을 더 소중히 여기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생일이나 기념일에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특별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로에게 실망하고 이럴 일이 없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큰 선물이었으니까.
연애초에 그에게 말했었다. 나는 값비싼 선물 안 좋아하니까 굳이 모든 기념일 다 안 챙겨도 된다고 말이다. 나는 진심이었다. 그 역시 자신도 소소한 일상이 더 소중하다며 하루하루를 이벤트처럼 더 사랑하자고 했었다.
분명 그렇게 서로 약속했는데......
그에게서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꾸준히, 어느 특정 기념일이 아닌 아주 평범한 어느 날에. 그 선물은 지난 "#3. 꽃 보러 갈래" 영상의 감동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감동을 준 선물이었다.
명품 가방도 아니고, 화장품 귀걸이 목걸이도 아니었다. 그가 아무 기념일도 아닌 그냥 평범한 어느 날에 나에게 선물이라고 건네준 건 그냥 노트였다. 단, 노트 한 권이 아닌 노트 여러 권.
그가 나에게 선물해 준 평범하지만 아주 특별한 노트
이게 무슨 노트냐고 묻는 나의 말에 그는 그저 쑥스러워하며 그냥 보라고 슬쩍 노트를 내밀었다. 처음엔 그냥 새 노트인 줄 알았다. 공부하는데 쓰라고 주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여러 권을 한 번에?
첫 번째 노트에 첫 장을 열어보는 순간 "아!" 외마디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기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간 그의 일기. 그리고 그 일기의 모든 날들에는 내가 있었다.
어느 날에는 일기로, 어느 날에는 편지로, 어느 날에는 짧은 단문으로 어느 날에는 긴 장문으로.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날 생각하며 날 위한 글을 썼고 그 글들을 차곡차곡 모아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이 있을까. 이보다 더 값진 날이 있을까.
그 덕분에 우리의 지난 하루하루는 매일이 기념일이었고 매일이 특별한 날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그는 꾸준히 4년의 연애동안 날 위한 일기이자 편지를 노트에 적었고, 꾸준히 때마다 노트들을 모아 선물해 주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쯤 그의 '작은 키' 때문에 고민하던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작은 키가 대수랴 마음의 크기가 이토록 크고 넓은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