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의 임용고시 재수 생활 동안 대중교통 뚜벅이 시간이 우리의 유일한 데이트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재미난 일은 덜컹이는 지하철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임용고시 준비를 하는 나를 위해, 면접에 나올만한 주제들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교육 가치관에 대한 생각을 많이 나누게 되었다. 특별한 데이트를 못해도 그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는 나를 데려다주는 길이면 하루치 공부를 복습할 수 있게끔 중요한 부분들을 되물어주고 같이 생각해 주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그와 1년 동안 나눈 교육에 대한 주제가 다양했으니 2차 면접시험에서 어떤 주제가 나와도 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시험에 대한 자신감이 붙게 되었다. 어서 시험날이 오기를 기다릴 정도로.
그렇게 나는 감사하게도 그해 임용고시 최종합격을 하게 되었다. 우리 관계를 알던 주변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임용고시 합격의 8할은 다 남자친구 덕분이라고. 책가방 들어주며 체력관리해 주고, 노량진 오고 가는 길을 늘 같이 걸어가 주며 멘털 관리해 주고, 교육 관련 대화로 지식 관리도 해주었으니 말이다.
임용고시 최종합격을 하였으니, 이제 우리 커플에게는 중요한 대화 주제가 하나 남아있었다.
그것은 바로 '결혼'.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관계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깊이 있는 대화를 많이 했었기에 서로가 서로의 결혼 대상자라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고시생 신분인 나로 인해 그 시기가 늦춰질 뿐이었다. 양가 부모님과도 연애초부터 이미 며느리, 사위처럼 친분을 쌓아갔던지라 부모님들께서도 우리 두 사람이 원하는 결혼시기가 언제인지만을 기다리고 있으실 뿐이었다.
그동안 결혼에 대해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정작 소위 프러포즈라고 이야기하는 "나랑 결혼해 줄래?"라는 멘트는 아직 듣지 못했었다. 나 역시 그에게 한 적이 없고 말이다.
"프러포즈"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 봤을 상황, 프러포즈. 특히 여자라면 더욱이 프러포즈에 대한 환상이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유독 그런 환상이 없었다. 환상이라기보다 꿈꾸던 게 딱히 없었달까. 결혼식 예물로도 쓸 수 있는 반지나 목걸이 등의 액세서리라던지 그 어떠한 물질적 선물을 바라지 않았었다. 실제로도 결혼반지를 굳이 새로 맞추지 말고 연애 4년간 끼었던 커플링을 그냥 결혼 후에도 쭉 이어서 끼자고 제안했을 정도로 말이다.
청혼에 대한 선물보다는 청혼을 하는 그 말, 그 언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러포즈"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프러포즈에 대한 나의 생각을 언뜻 말했던 기억이 있다. 무언가 고백할 때는 선물보다는 그 말을 하는 날의 분위기, 그 말을 하는 사람, 그 말의 의미가 나는 더 뜻깊게 다가올 거 같다고.
그렇게 결혼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한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 가장 하고 싶은 것.
언젠가 그가 나에게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어디고,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언제고, 그곳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남산타워 / 노을 /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같은 노을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것."
나는 서울의 남산타워를 참 좋아했다. 높은 곳에서 전망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여행을 가도 뷰 좋은 방을 선택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남산타워를 좋아했는데 남산타워는 올라오는 이들에게서 저마다의 낭만적인 사연과 행복감이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노을이 지기 시작해서 야경이 펼쳐지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던 날이든 혹은 아주 힘들었던 날이든 간에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이 나의 그 어떠한 하루도 따뜻하게 물들여주며 수고했다고 감싸주는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주 예전부터 장소불문 노을 지는 시간대를 가장 좋아했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내가 좋아하는 남산타워에 내가 좋아하는 시간대인 노을 지는 시간에 올라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노을을 야경이 질 때까지 함께 바라보며 느끼는 것이었다. 서로를 마주 보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정말 중요한 날 중요한 선물을 받아야 한다면 그 어떤 물질적인 선물보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시간대에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걸 함께 하는 것. 그 함께하는 시간으로 충분, 아니 넘치게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게 언제였나 잊어버릴 때쯤, 또 한참 지난 어느 날. 우리는 서울 명동 데이트를 가게 되었다. 뭔가 특별한 날임을 예상할 수 없게 그저 평범한 하루, 평범한 오후, 평범한 데이트였다. 여느 때처럼 맛있는 밥을 먹고 예쁜 카페에 갔고 그날도 뚜벅이 커플답게 특별한 목적 없이 눈앞에 보이는 남산타워를 가자고 했을 뿐이었다.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한 채 남산타워까지 올라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사진도 여러 장 찍으며 한껏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유독 시계를 계속 쳐다보며 말수가 줄어든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여기인가 저기인가 찾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가 나를 이끌고 갑자기 다른 스폿으로 가야 한다며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있었던 곳은 전망대로 유명한 곳이긴 했지만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긴 했다.
'이미 유명한 관광지이자 주말이라 어느 곳을 가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굳이...?'
이런 내 생각을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는 내 손을 이끌고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학생 때 나름 꽤 여러 번 왔었던 곳이라 남산타워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따라간 곳은 처음 가본 곳이었다. 미로처럼 슉슉 요리조리 나를 데리고 가더니 어느 한 곳에서 드디어 그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이곳이구나!
그의 발걸음이 멈춰 서자마자 내 입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대박"
"남산타워에서 이렇게 노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고요?"
눈앞에 펼쳐진 건 그냥 노을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껏 봐왔던 노을 중에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주황빛과 분홍빛 그 언저리에서 붉게 타오르는 노을, 어둠에 사라지기 아쉬운 듯 두둥실 남아있는 약간의 구름들. 어떠한 건물도, 사람도 이 모든 것을 내 시야로부터 가로막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딜 가든 사람들이 우르르 많이 모여있던 그곳들과 같은 공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곳은 오직 우리 둘 뿐, 고요한 침묵과 붉은 노을만이 우리와 함께할 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주변의 그 어떠한 소음도 없이 노을만을 바라보며 감동을 받고 있던 그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세잎아(필명) 나랑 결혼해 줄래?
잠시 잊고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한 선물을 말이다.
그는 아주 예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나의 가장 좋아하는 장소,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프러포즈 선물로 준 것이었다. 어느 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 멋진 광경을 프러포즈 선물로 받을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내가 "남산타워에서 노을을 보는 것"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들은 순간부터 이곳에서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퇴근 후 틈나는 대로 남산타워를 찾아가 가장 노을이 예쁜 시간대가 언제이며, 노을을 바라보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인지 몇 번이고 사전답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번 직접 발로 뛰어본 결과 이 시간, 이 장소의 노을을 나에게 선물로 줄 수 있었다고 했다.
'아 그래서 그렇게 시계를 들여다보고 두리번두리번 댔던 거구나!'
이보다 멋진 선물이 있을 수 있을까. 노을을 선물로 받다니.
또다시 그의 정성에 감동을 하며, 그렇게 나는 노을 프러포즈에 대한 대답을 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인걸요. 저랑 결혼해 줄래요?
프러포즈를 받았던 그 시간에는 사진 찍을 생각조차 못한 채 넋을 놓고 있었기에...... 프러포즈를 받고 집에 가는 길에 찍은 남산타워의 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