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차인 건가?

역고백

by 세잎

그와의 삼세번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고백을 받고, 바로 다음 주인 12월 30일 첫 번째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2015년 12월 30일

첫 데이트


취미가 무엇이고, 어떤 데이트를 하고 싶냐는 그의 질문에 전시회나 미술관 등을 구경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말에 그는 서울에서 진행하고 있는 거의 모든 전시회와 미술관, 박물관 정보를 찾아서 나에게 알려주고 그중에 가장 가고 싶은 곳 한 곳을 고르라고 했다.


고심 끝에 전시회 하나를 골랐고, 전시회는 덕수궁 돌담길로 유명한 정동길 주변에 있었다. 고층빌딩보다는 고즈넉한 거리를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장소였다.


처음으로 같이 발맞추어 오랜 시간 함께 길을 걸어보고, 비슷한 취향과 비슷한 취미에 걸맞은 전시회를 같이 보고, 좋아하는 커피 향에 끌려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종일 그와 함께 거리를 거닐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토록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대화가 즐거웠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성스럽게 다가왔다.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는 잠깐의 침묵조차 버겁거나 불편하지 않았고, 침묵의 공기마저 여유롭게 느껴질 만큼 편안하고 따뜻했다.


가슴 찌릿한 설렘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공기와 온도가 아직까지 기억이 날 정도로 여운이 짙은 데이트였다. 헤어짐이 아쉬웠다.


그렇게 우리는 두 번, 세 번의 데이트를 더 하게 되었고,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전해야 할 때가 되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의 마음은 무엇일까.

그의 마음이 예뻤고, 진심이 느껴졌고, 무엇보다 만남을 가질수록 그가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선뜻 고백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하기에는 고민이 되는 한 가지가 남아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부모님, 나의 아빠였다.


아빠는 굉장히 보수적이시지만 딸바보인 아빠셨고, 나는 그런 아빠의 속을 썩이지 않기 위해 눈치껏 알아서 잘해왔던 삼 남매 중 둘째 딸이었다. 임용고시 준비하면서 연애를 한다는 건 아빠가 들으시면 걱정이 될 만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더군다나 딸바보인 아빠가 딸내미의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실 텐데 하필(?) 그때 그는 이직 준비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한마디로 무직인 상태였다.


여러모로 아빠의 반대를 사기 쉬운 연애였다. 원래 같았으면 공부도 공부고 아빠와 다투면서까지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서 고백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부모님 하라는 대로 하는 어린 학생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내 연애는 내가 알아서 하는 거지. 아빠가 반대해도 뭐 어쩌겠어. 차라리 아빠한테 비밀로 하고 비밀연애 하지 뭐.'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그의 고백에 대해 YES를 외칠 생각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고백에 대한 대답으로 "나 역시 당신이 좋아졌다."는 역고백을 하러 가는 길, 그때는 몰랐다.


역고백에 차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나를 2년이나 좋아했다고 말한 사람한테 말이다.




2016년 1월 9일

고백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기로 한 날.


원래는 고백을 듣고 한 달 뒤에 대답을 해주기로 했지만, 성격상 이미 마음이 정해졌으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바로 약속을 잡았다.


나의 대답 후에 우리는 오늘부터 1일이 되는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아직 나의 대답이 무엇인지 모를 그도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왔으리라.


카페에서 그를 만난 후 차분하게 나의 생각을 전했다. 다시 한번 고백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나도 오빠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고,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만남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단지,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부모님이라고 했다.

"저번에 같이 대화하면서 말했지만, 저희 부모님이 좀 많이 보수적 이셔서요. 고시준비하면서 연애하는 것도 탐탁해하지 않으실 것 같고...... 아무래도 부모님께 들키지 않는 비밀연애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부모님이 왜 마음에 걸리는지 부모님과 나의 관계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전의 많은 대화들을 통해 그동안 내가 부모님과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부모님께 인정받기 위해 어떠한 피나는 노력들을 해왔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한참을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2년을 짝사랑해 온 여자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며 연애를 시작하자는데 너무나도 차분한 것이다. 나라면 짝사랑의 결실로 기뻐 날뛸 거 같은데.... 그는 그 어떠한 표정변화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내 이야기를 경청한 후에 그가 꺼낸 말은 생각지 못한 예상밖의 말이었다.


"세잎아(필명), 일단 고백받아줘서 너무 고마워."


"너무 고마운데 저번에 대화하면서 세잎이와 부모님의 관계가 어떠한지, 세잎이가 아빠와의 신뢰관계를 쌓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오빠가 들었었잖아. 그런데 이렇게 비밀연애를 하게 되면 세잎이가 부모님께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사람인지라 그 거짓말들은 언젠가 들통날 수 있어. 그 순간 부모님이 세잎이에게 실망하시는 순간들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야. 오빠는 오빠가 2년 동안 좋아해 온 사람과 연애하는 것도 너무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힘겹게 쌓아 올린 부모님과의 신뢰관계가 나로 인해 깨뜨려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순간 머리가 띵했다.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는 생각했다. 고백을 받았고, 나 역시 그가 좋아졌다고 교제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은 것이다. 결국 지금 당장 연애를 시작하지 말자는 이야기인가?




내가.. 차인 건가..?


이어서 그는 이러한 말들을 덧붙였다.


"저번에 세잎이한테 고백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올해는 바로 옆에서 진짜 남자친구나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다 챙겨줄 거야. 누가 봐도 연인인 것처럼 연인으로서 챙겨줄 수 있는 모든 것 말이야. 대신 부모님 걱정 끼치지 않도록 남녀 간의 연애를 상징할 수 있는 '스킨십'은 일절 하지 않을게. 부모님께서 우리의 연애에 반대하시지 않을 때까지, 우리 사귀는 사이라고 당당하게 말씀드릴 수 있을 때까지 세잎이가 걱정하는 부분이 없도록 손끝하나 만지지 않을게. 약속할게."



이런 남자는 처음 만나봤다. 처음에는 뭐지 싶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또한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의 스킨십 없는, 손 한번 잡지 않는, 연애 아닌 연애 같은 연애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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