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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잎 May 12. 2024

<학급경영> 우승보다 중요한 것

체육대회

한해 중에 가장 뜨겁고 가장 열정적인 하루, 체육대회가 끝이 났다.



형형색색의 반티를 뽐내며 신나는 음악이 하루종일 울려 퍼지고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는 날, 담임으로서 그날을 함께한다는 것은 매우 값지고도 신나는 일이다.


아이들이 맞춰준 반티로 갈아입고는 우리 반 자리로 향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체육대회하면 줄넘기, 계주, 부채춤공연 이런 것이 다인데 요즘 아이들 종목은 이름부터가 심상치 않은 것들이 많다.


태풍의 눈, 구름다리, 파도타기 등등..


그저 보는 재미도 쏠쏠한 요즘 체육대회이다.


획일적으로 똑같이 한 공연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축하공연과 장기자랑 또한 체육대회의 꽃이다.


교사입장에서 바라보는 체육대회는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것 투성이지만 학생들은 다르다.


특히나 남학생들은 한껏 상기된 표정 혹은 비장한 표정으로 경기에 임하곤 한다. 흡사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나 또한 학창 시절 계주출신에,  한 승부욕 하던 사람이라 학생들의 마음이 잘 이해가 간다. 1등 상품이 학급전체 피자가 걸려있는데 목숨을 못 걸까.


하지만 교사가 되어보니 이제는 우승보다는 같은 반 친구들끼리 하나가 되어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담임으로서 당연히 우리 반이 1등을 하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1등보다 더 원하는 것이 생기게  것이다.


우리 반 학생들의 단합,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이기면 이기는 대로 함께 기뻐하고, 지면 지는 대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예쁜 마음.


그 마음들을 학생들이 이 체육대회에서 얻어갔으면 했다.


일부러 큰 기대 없이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 반 경기들을 지켜보는데, 어라?


'너무 잘하는데???'


반 학생들도 애초에 담임인 나에게 "선생님 큰 기대하지 마세요. 저희 힘캐(힘쓰는 캐릭터)가 없어서 못할 수도 있어요." 하며 소위 밑밥을 깔아놨던 터라 큰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합이 잘 맞을 수가!


한 경기 한 경기 1등 혹은 2등을 해가며 상위권을 유지하니 나도 학생들도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승리에 한껏 신이 나 체육대회를 더욱 즐기고 있던 , 옆반 여학생들이 하나, 둘 우리 반 자리로 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희 반에 못 앉아 있겠어요......."

"왜????"

"애들이 저희 때문에 진 거라고 막 뭐라고 해요. 지금 저희 반 분위기 너무 험악해서 같이 못 있겠어요......"


그 말을 듣고 옆반을 쳐다보니 남학생들 얼굴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몇 날 며칠을 연습했기에 더욱더 승리가 간절했을 것이다. 이기고 싶은 마음도 너무나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결과는 나온 것.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그 결과가 뒤집혔을지언정 한 팀으로 나온 이상 한 명의 실수는 곧, 반 전체의 실수나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에 대해 승복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옆반 여학생들을 다독이고 자리로 돌려보낸 후 우리 반 아이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전 경기의 승리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채 체육대회를 즐기고 있는 아이들의 기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우리 반은 패배 후에도 저렇게 기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남 탓을 하며 남은 경기들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다음 종목이 찾아왔다. 종목은 줄다리기. 우리반의 최약 종목이었다.


우리 반 차례가 되어 아이들을 내보내려는데, 갑자기 반장이 아이들을 불러 모으더니 반 아이들 전체가 둥그렇게 모여서 파이팅을 외치자 하는 것이 아닌가. 3학년 모든 반중에 경기 출전 전에 다 같이 모여서 파이팅을 외치는 반은 우리 반뿐이었다. 담임인 나까지 다 같이 어깨동무하며 "하나, 둘, 셋 파이팅!!!"을 외치고 아이들을 경기장으로 출전시키는데 파이팅이 뭐라고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포기할 수도 있는 종목에 반 전체가 하나가 되어, 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힘내보자고 파이팅을 외치다니......!


하지만 결과는. 패배.


발을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느라 옆에서 응원도 못하고 우리 반 벤치에 앉아 멀찍이 경기를 지켜보았는데, 패배가 확실시되는 순간 고개 숙인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낙담하며 조금 전 옆반 아이들처럼 혹시나 누군가의 탓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사기가 떨어졌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우리 반 자리로 돌아온 아이들 입에서 나온 말들은 또 한 번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다친 사람 없지? 그럼 됐어."

"야 어차피 우리는 힘캐(힘쓰는 캐릭터) 아니었잖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괜찮아'라는 이 짧은 한마디가 이렇게 큰 힘을 줄 줄이야. 승부욕이 불타는 혈기왕성, 어리다고만 생각한 중학교 3학년 아이들에게 이렇게 성숙한 위로가 오고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줄다리기 외에도 누군가 한 명의 실수로 인해 실격처리가 되어 1등을 눈앞에서 놓친 경기도 있었지만, 그 경기조차 우리 반 학생들은 끝까지 누구 탓을 하지 않았다.




우리 반 학생들은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승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코로나로 인해 더욱 개인적으로 바뀌어버린 일상, 그 일상들이 지나고 몇 년 만에 찾아온 단합의 기회에 우승보다는 그저 함께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벅차고 대단했다는 것을. 그저 같이 기뻐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함께 힘내면 우승이 덤으로 찾아올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승리한 종목에는 다 같이 기쁨을, 패배한 종목에는 다 같이 위로를 주고받다 보니 정말 우리 반은 마지막에 총점 1등이 되어 있었다. 서로를 격려하던 단합된 모습뿐만 아니라 대회 중간중간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쓰레기를 치우던 예쁜 학생들 덕분에 학년에서 딱 한 학급만 받을 수 있는 응원상까지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체육대회는 참 여운이 오래간다.


우승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담임인 나의 마음가짐과 반 학생들의 마음이 같았다는 사실에 학생들에게 참 많이 고마웠던 하루였다.


학교란 참..

어리고 미성숙한 학생들로 인해 힘든 순간도 많지만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학생들로 인해 어른인 내가 오히려 배워가는 게 더 많은, 

참 아이러니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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