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존재의 이유
일병.
'일병은 일 많이 해서 일병'이라는 말이 있다. 병사라는 신분 자체가 군에서 지시를 가장 많이 받는 계급인데, 그중 일병은 선임들이 가장 일 많이 시키는 계급이다.
그래서 그럴까, 일병을 달면 군 생활이 급격히 재미가 없어진다.
초반에야 작대기가 이제 2개랍시고 으쓱하지만, 점점 '너 이제 이등병 아니야'라는 말과, 챙겨야 할 후임이 하나 둘 생기면 이등병 때의 온정은 온 데 간 데 없고 이따금씩 화살이 날아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권태감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도파민 결핍에서 온다. 왜냐하면 군 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뭔가 이렇게 장기간 변화가 없는 게 처음이라서 그렇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앞에서 말했듯 훈련병, 이등병 때는 거처도 자주 옮기고, 진급도 금방인 데 비해 그때 기준 일병은 7개월이나 지나야 상병이 될 수 있고, 어리버리한 신병이 귀여운 것도 한 두 명이지, 계속 들어와 봐라. 힘듭니다.
그렇게 새로운 계급장과 새로운 후임을 반가워하며 초롱초롱했던 일병은, 흔히 우리가 아는 병사 특유의 무표정을 띄게 된다. 분명 무표정인데, 뭔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그런 표정. 그게 디폴트가 됩니다.
그렇게 사춘기가 온다. 일병도 사춘기 옵니다. 질풍가도를 달리던 10대, 스쳐갔던 그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대체로 일병 4~5개월 차, 이른바 일병 시기가 꺾이는 '일꺾'때 심심찮게들 이런 감정을 겪는다. 자연재해다. 약도 없습니다. 이 시기에는 뭐든지 마음에 안 들고,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고, 다 나한테만 시키는 것 같다.
심하면 '나 없으면 부대 안 돌아가겠구만'이라는 건방진 생각도 하는데, 여기다 주변에서 '에이스'라는 가스라이팅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그렇게 번아웃이 올랑말랑 아슬아슬 흐느적흐느적 도파민을 갈구하던 나에게 구미가 당기는 공지가 떴는데, 곧 분대장을 새로 선발한단다.
우리는 분대장이 2명 있었는데, 그중 1분대장이 전역시기를 고려해 이임하게 됐고, 이로 인해 2분대장을 한 명 새로 선발한다고.
선발방식은 100% 추천이다. 분대장끼리 한 명을 추천하고, 행보관님이 중대장님께 보고하여 승인하는 방식이었다.
주변 동료들의 추천으로 임명되는 자리라 은근 명예가 따르고, 심지어 중대장님이 직접 녹색 견장을 달아주는 이취임식도 열린다. 이거 못 참지.
듣자마자 내꺼다 싶었다. 그래, 이제 후임도 좀 들어왔고, 지금 중대에 실질적으로 일 다하고 있는 게 난데, 내가 아니면 누가 하냐. 무조건 나다 싶었다.
'오늘은 발표 나려나?' 라는 생각에 두근거리면서 잠에서 깨고, 다시 예전처럼 눈에 생기를 띄며 맡은 일에 정성을 다했다.
취침시간이 되고 소등 이후 우리끼리 조용히 갖는 스몰토크 때도 선임들이 '다음 분대장 누가 될까?'라는 예상에 내 이름도 거론되자 '에이~ 제가 말입니까~?' 하며 어색하게 손사래를 치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발 결과가 떴는데,
.. 표정이 썩어버렸다.
납득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기다렸기에 실망스러웠고, '내가 분대장 잡으면..' 하며 할 일을 구상했던 내가 창피해졌고, 무엇보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배신감이 가장 컸다. 게다가 '저 사람보다 못난 게 뭔데' 라는 박탈감으로 번졌다.
상병까지 3개월이나 남았고, 녹색 견장을 다는 상상을 하며 잠들던 나에게 더 이상 목표라는 게 없어졌다. 심지어 방금 일병이 된 막내와 같은 '일병'으로 불린다는 것 자체에도 불쾌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다 마음에 안 든다. 내가 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폭풍을 지나서 맞은 주말.
원래 그러면 안 되는데 혼자서 PX까지 걸어갔다. 사춘기가 제대로 와버린 일병이 고른 것은 레종 한 갑, 바로 담배였다. 나는 비흡연자였는데, 암튼 그렇게 됐다.
스스로 돌파구랍시고 찾은 것이 그런 거라니. 보고 배운 게 걸핏하면 담배 피우러 가는 거였으니까. 그럼 좀 나아질까? 진짜 효과가 있긴 할까?
그리 많이 피우진 않았는데, 내가 담배 피우는 걸 봤다는 얘기가 돌면서 나는 반장님과 면담까지 해야 했다. 그게 뭐 극단적인 선택으로 가는 시그널 중 하나라나..
어쨌든 다 지난 분대장 이야기로 질척대진 않았다. 그냥 호기심이라고, 걱정 마시라고 대충 둘러댔다.
그렇게 일하다가도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또는 '고생하셨습니다. 담배 한 대 피우십니까?'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운 기분.. 묘하더라.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웃고 있었지만,
그러나 분명 잘못된 방법이었다.
그렇게 배덕감을 느끼던 중 대대장님이 중대에 방문하셨다. 늘 오던 날에 오셨고, 말씀하실 때 절대 빼먹지 않으시던 게 있었는데, 지금도 줄줄 외울 만큼 항상 강조하신, 바로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는 365일 24시간 현행작전부대다. 현행작전을 하려면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나. 모든 기준을 이 질문에 맞춰라.'
항상 이 말씀으로 운을 띄우시고 그 뒤에 부하들을 격려하셨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상투적으로 느껴졌던 그 말이 그날따라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날 저녁, 나는 일기장에서 스스로에게 본질을 물었다.
'365일 24시간 현행작전부대에서 나의 본질은 뭘까.'
내 직책부터 맡고 있던 업무들, 심지어 작성하던 한글파일 하나하나가 왜 있는지,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없는 것 같으면 억지로 끼워 맞추기라도 했다.
그렇게 따분하게 처리하던 일들인데, 그날 스스로와 나눈 필담에서 조금씩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시켜서 하는 일이라 못 느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니 어느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더라.
그 일들의 이유를 발굴하고 나니, 그 일을 하는 '나'까지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글 초반에서 건방지게 했던 '나 없으면 부대 안 돌아간다'라는 말, 뉘앙스를 좀 바꿔서 사용하기로 했다.
부대가 돌아가려면 나도 필요하다.
우리 각자가 모두 필요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음을 깨닫듯,
나는 중심에서 건강하게 벗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