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飛上) 말고
순진무구한 이등병이 자대에 가기까지 꽤 많은 시간과 장소를 거친다.
나의 경우 입영심사대(3일) - 훈련소(5주) - 특기학교(2주) - 대대본부(3일)를 지나왔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는 '왜 이렇게 애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냐..' 며 불만을 토로하시기도 했다.
아무튼 자대로 가기 전날밤, 두려움보다는 기대로 잠을 설쳤다.
'내일이면 떠돌이 생활도 끝이구나.. 그래, 이제 짐 좀 그만 쌌다 풀고 정착 좀 하고 싶다..' 하며 바뀐 잠자리에서도 제법 빠르게 잠들고 있었다.
날이 밝고, 대대본부에서 나를 인솔해주실 행정보급관(행보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온 동기들이 3명 더 있었는데, 한 명은 여기 본부에 배치되어 남게 됐고, 나머지 둘은 전방으로 떠났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도 알쏭달쏭했다.
잠시 후, 앞으로의 군 생활을 함께할 행보관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영화처럼 대충 트럭 뒤에 실려가는 줄 알았는데 웬걸, 깨끗한 은색 카니발이 있었다. 자대.. 잘 받았나..?
그렇게 1시간 정도 달렸다.
나는 속으로 더 달리길 빌었다.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가길.. 그리고 맨날 우르르 발맞춰 뜀걸음이나 하다 승용차를 타니 구름을 타고 있는 기분이더라. 오늘만큼은 손오공 저리 가라였다.
이제 내리자는데, 엥? 군 부대라기엔 막사가 그냥 1층짜리 건물인 데다 일반 주택같이 생겼다. '부대가 작지? 있을 건 다 있다~' 하시더니 나를 행정반으로 안내해 주셨다.
따라 들어가며 빠르게 둘러보니 한 층에 지휘통제실, 행정반, 운영반, 생활관, 식당이 다 있더라.
뭐 땅콩집 그런 건가? 심지어 생활관은 예능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침대가 아니라 바닥으로 된 침상.. 흠.. 살짝 갸우뚱..
어쨌든 짐을 내려놓고 행정반에 앉아 있었는데, 한 간부님이 지나가다 말을 거셨다.
'신병이구나. 주특기 뭐냐?'
'TOD병입니다!'
'그래? 여기 TOD 없는데?'
.. 서로 벙쪘다.
후문으로, 내 주특기 TO가 일단 대대 전체로 나오기 때문에 간혹 이렇게 남는 사람이 우리 중대로 튕겨 오기도 한다고.
뒤이은 질문이
'너 집에 높은 사람 있는거 아니냐?'
'너 한글 좀 만질 줄 아냐?' 였는데,
.. 이거 어쩌면 내가 상당한 럭키가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몸 쓰는 곳은 아닌가보다..!
그렇게 일과시간이 끝날 때쯤 맞선임들이 생활관에 도착했고, 감사하게도 내 짐을 다 풀어 관물대에 정리까지 해주셨다.
몸 둘 바를 몰라 신병답게 버둥버둥 '아잇 제가 하겠습니다'를 난사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정리하는 법도 모르지 않나며 원래 첫날은 맞선임이 해주는 거라고 한다.
'나도 그랬어. 너도 후임 오면 해줘.'
그 말이 어찌나 따뜻했는지, 아직도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라 약 10년이 지난 지금도 후배들한테 종종 쓰고 있다.
선임들의 환대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맞선임이 짐 정리해 주는 것에 이어 신병 받는 문화가 또 있다는데, 바로 짬밥 딱 1년 차이인 '아버지 군번'이 신병을 PX에 데려가 한 바구니 가득 채워 사주는 것.
어쩌다 보니 꽉 채우긴 했는데, 내 손으로 담은 건 거의 없었다. 모두 선임들이 '이거 꼭 필요하다', '이거 진짜 꿀맛이다' 라고 추천하며 담아준 것들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왁자지껄 떠들며 앞장선 선임들의 뒤를 쭈뼛쭈뼛 따라가는데, 나는 그 밤길만큼 마음이 따뜻했던 적이 없다. 예상외로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포천의 11월 밤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선임들이 '저거 뭐야' 하면서 뛰기 시작했다.
한밤 중인데 부대 앞에 차가 많이 있었고, 간부님들이 하나 둘 급하게 주차하고 건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아닌 밤 중에 비상(非常)이 걸린 것이다. 전방지역에 특이사항이 생겨 정보부대였던 우리가 긴급하게 뭘 좀 해야 한다고. 소란스러웠다.
다행히 1시간도 채 안되어 비상은 해제되었다. 우리가 굳이 긴급임무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상황이었다고 한다. 한시름 놓긴 했지만, 가슴 깊이 커다란 물음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넌 그냥 옷 갈아입고 앉아있으라 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임들을 보니 전투복 입고 어디론가 뛰어가더라.
어디로 가는 걸까. 긴급임무란 뭘까. 누구는 무전기에다 대고 뭘 말하던데, 뭐라고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내 총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아는 게 없어 아무것도 못했다.
흔히 병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병사는 지휘체계 상 가장 말단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휘관도 전쟁통 속에서 하나하나 디테일한 명령을 해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상부에서 어디를 점령하라고 했다면, 그 과정에서 총은 병사 개개인이 알아서 쏴야 하는 거지, 지휘관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작 작대기 하나 달았다고 병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밤 적과 싸워 이기려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그 속에서 내 역할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이등병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다.
이등병도 오늘밤에 싸울줄 알아야 한다.
쪽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