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세계 2024년 8월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누군가를 사로잡을 만한 특색있는 도전이라기엔 평범하고 잔잔하지만, 만만하지는 않은 도전을 했습니다. 일상에 루틴을 만들고, 중독적인 쾌락을 자제하면서, 그러니까 좀 어른스럽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책 ‘도파미네이션’ 때문인지, 자기관리를 못 하는 저에 대한 쪽팔림 때문인지, 그저 한 6춘기쯤이 진행 중인 건지 알 수는 없지만요.
어쨌든, 이번 기회를 통해 더 성숙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었어요. 솔직하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빨리 나만의 멋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새벽 러닝도 시작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스쾃 같은 근력 운동도 하고, 정해진 시간과 규칙을 잘 지키며 생활하는 것도 생각보다 수월하게 해냈습니다. 10일 차쯤, 자신감을 얻고 내가 최종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목표들을 정하고 계획을 세웠는데, 14일 차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의미가 없진 않았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겉만 늙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을 찾고 목표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죠. 실패하면 좌절하고 한동안 우울이라는 바다에 떠다녔지만, 결국은 해결하고 다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취업도 빨리했고, 지금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있어요. 주위 어른들은 자기 아들도 나처럼 빨리 현실을 인지하고, 현명한 선택을 해서,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며 부러워하곤 합니다. 그래서 착각했어요. 친구들보다 월등히 성숙하다고. 또래 친구들은 이미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가르침의 대상이 돼버렸죠. 이번 도전을 통해 삶의 방식마저 정립해 낸다면, 남은 열등감마저 극복하며 제가 진정으로 원하던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그래서 14일 차에 실패하자마자 저 스스로가 너무 싫어졌습니다. 이미 꽤 어른스럽고 성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소한 계획조차 성취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창피했습니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겠죠. 확실한 꿈을 가지고, 철저히 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해내는 것.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여러 욕구나 감정들을 어른스럽게 통제하는 것. 위기를 기회 삼아 극복하는 것.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숙의 조건이 아니라 ‘성공’의 조건이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연스러운 멋은 ‘성숙’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철저히 계획을 세우고 통제해서 성취하면 이뤄낼 수 있다는 ‘성공’의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죠.
저는 매우 이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 기준을 채우지 못한 자신을 받아낼 만큼 너그럽지 못합니다. 특정한 성취를 해내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도, 내가 정한 기준을 넘어섰다고 느끼지 못하면 수치스러울 정도로 그릇이 작습니다. 욕심이 많으니, 마음은 급하고… 머리로는 시계의 시침처럼 여유 있게 움직이려 하지만, 심장은 초침처럼 똑딱거리는 꼴이죠. 저는 어렸을 적 별명처럼 애늙은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을 이루는 것 보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 앞에 등장한 빠네 파스타의 크림이 욕심처럼 흘러넘칩니다. 청송에서 서울까지 오는 걸로 부족하여, 서울에 숙소까지 잡아 놓고, 굳이 일산의 유명 맛집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이곳에서 갑자기 빠네 파스타 타령인지 혼란스러우실 것 같습니다. 게다가 빠네 뿐만 아니라, 함께 등장한 바로 이 자바칩 프라푸치노, 일명 자바칩 쥬디치노 때문에 왔다면 믿어지실까요.
제일 좋아하는 파스타가 빠네 파스타이고, 가장 좋아하는 프라푸치노가 자바칩이기 때문인데,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어머니와 함께 이곳에 등장한, 꽤 어른인 척하는 중학교 아이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양식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 느끼함의 시작이 쥬디스 커피의 빠네 파스타였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실 줄 모르던 아이는 어딜 가든 항상 아이스 초코를 주문했고, 그 달달함의 끝이 바로 이곳의 쥬디치노입니다. 한마디로, 이곳의 빠네 파스타는 시작이고, 쥬디치노는 끝인 셈이죠.
중학생 때부터,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이후 대학생 때까지 고립, 우울, 무기력이 점점 심해져 이 짧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었던 대학교 1학년 어느 날 밤엔 자살을 마음먹고 스스로를 정서적으로 학대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 변함없이 단시간에 저의 에너지를 올려주고, 때론 위로해 주고, 때론 원망도 받아줬던 음식이 바로 빠네와 프라프치노입니다.
이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독서 모임의 도서로 ‘어떤 돈가스 가게에 갔는데 말이죠’를 읽고 나니 제일 먼저 이곳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고, 운이 좋게도 시간이 생겨 바로 올 수 있었습니다. 향 같은 것을 맡고 묘사해 볼까 하다가 원래 하던 대로 바로 한 입 먹었습니다. 마치 이반의 개가 된 것처럼 먹기 전부터 침이 나오더라고요. 일단 쥬디치노를 한 모금 마셔서 입안을 달달 촉촉하게 만들었습니다. 빵 먼저 먹으라고 하셔서, 빵의 거친 바깥쪽에 크림을 발라 먹었습니다. 빠네의 사방을 가위로 끊어주고 새우 하나를 먼저 포크에 꽂아 놓고 그 위로 파스타를 돌돌 만 뒤 빵을 찢어서 포크의 맨 위로 꽂아 먹으려 하니, 생각보다 꽤 크더군요. 그러나 일단 입안으로 집어넣었고 결국, 입천장을 골고루 데었습니다. 얼른 쥬디치노를 소방수로 활용했지만, 화재 진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자바칩은 정말 달고 시원했습니다. 뉴런들이 반짝거리면서 쭈뼛대는 기분이랄까요. 옆 테이블의 한 MBTI 광신도가 유형을 물어보고 나서는 이거는 이래서 이렇고 저거는 저래서 저렇다는데, 심리학도로서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숏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실 최근에는 MBTI 토크만큼 라포를 형성하는데 좋은 방법도 없으니까요. 다 먹을 때쯤 되니, 항상 그랬듯, 빵만 남고 면이 없어지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배는 가득 찼습니다. 오랜만에 먹는 것이니 빵까지 어떻게든 다 먹었습니다. 역시 나의 긴 여정에 이유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할 만큼 풍족한 식사였습니다. 이로 작가님처럼 하나하나 자세히 기억할 자신이 없어서 먹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었는데, 인싸나 BJ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매우 어색했습니다. 사실 촬영 시작할 때 사장님의 눈을 마주쳤는데, 살짝 부끄러웠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혼자 자주 다니는 남자라 그런지, 친절하지만 무심한, 그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잘 지켜주시는 사장님들이 정말 좋습니다. 쥬디스 커피의 근무하시는 분들이 여기에 딱 맞는 분들이셔서 참 좋았습니다. 평점이 높은 데엔 다 이유가 있겠죠. 어머니 말로는 원래 파스타 전문점이었다고 하니, 맛도 있고 친절하기도 하고, 말 다했죠. 다 먹고 치우고 나서도 남아있는 진한 크림 향기, 찐득한 느끼함을 달래주는 달달한 쥬디치노, 단 입은 추가로 주문한 아메리카노의 씁쓸함으로 잊어내는 시퀀스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합니다.
처음 독서 모임용 글거리를 찾을 때부터 쥬디스 커피를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위에선 제일 먼저 이곳이 떠올랐다고 썼으니 거짓말 같겠지만, 정말 거짓말이 맞습니다. 강조를 위한 것이었다면, 용서를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시간이 생겨 서울에 놀러 갈 수 있었고, 가는 김에 최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이탈리아식 빠네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알고리즘이라는 바다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실려다니다 수요미식회 파스타 편까지 이르렀는데, 이것이 쥬디스 커피를 떠올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전통 레스토랑엔 빠네 파스타는 없고, 이탈리아 파스타는 원래 소스가 매우 적은 것이 특징이며 면 맛으로 먹는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이게 무슨 국물 없는 칼국수 같은 소리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고, 진짜 원하는 맛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 아직 소스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빵 위로 흘러넘쳐서 남은 빵을 다 찍어 먹고 나더라도 소스가 남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어리고 미성숙하기 때문일지라도, 이제는 그런 저 자체로 좋습니다. 처음 이곳에 와서 빠네와 쥬디치노를 먹었던 기억과, 함께한 수많은 추억을 마음이라는 빵 바구니에 흘러넘치게 담으며 카페를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