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사탕 Oct 21. 2024

새로운 시작, 프러포즈

  미국에서의 결혼은 절차가 번거로웠다. 법원에서 결혼식 허가서를 받아야 하고, 결혼식 허가서를 바탕으로 결혼 날짜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결혼 날짜를 신청하면 카운티에서 배당한 주례 앞에 서서 선서를 하고, 예물을 교환한 후 당사자와 주례, 증인 두 명이 함께 사인한 혼인 확인서를 제출하면 우리식의 혼인신고는 마무리되는 셈이다. 그리고 사본을 발급받아 간직하면 된다.

  다니엘의 설명이 그랬다. 한국처럼, 누군가 주민센터에 찾아가 신고하면 끝나는 그런 간편한 절차가 아니었다. 결혼이 철저히 법과 제도에 의해 성사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석됐다. 한마디로 말해 법적인 의무에 따라 법적 보장까지 받는, 법에서 시작해서 법으로 끝나는 절차였다.

  하지만, 다니엘과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철저히 법적 제도로 존재하는 미국의 절차를 따르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결혼 제도에 구속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되고, 제도에 의해 사람이 얽매이고, 결국 그렇게 제도가 인간을 구속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신고하거나 허가를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래적인 권리에 속했다. 인간이 가진 혼인의 자유를 철저히 지키고 싶었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기 위한 권리였다.


  큰 애는 뉴욕으로, 작은 아이는 시애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큰 애가 다음 학기는 상담 센터 쪽으로 인턴을 나가야 한다며 일찍 서둘렀고, 작은 애는 이유 없이 누나가 가려고 하니 집에 혼자 있기 싫다며 일찍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아빠는 결혼했대."


  나는 속으로 놀랐다. 그렇게 결혼 생활에 대해 치열하게 부정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개인적 성향이 누구와 함께 산다는 성향과 맞지 않다고 했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공맹에 버금가는 인격을 가진 사람일 거라며, 제도는 죄다 통제 수단일 뿐이라는 걸 나중에 결혼 후에 알게 되었다는 말로 내 신경을 건드렸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빨리 재혼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누구랑 하셨대?"


  운전 중인 다니엘이 물었다.


  "잘은 모르는데, 누가 소개를 했나 봐요, 학교에 학과장? 그런 분이라고 하던데?"

  "평소 알고 지냈었나 본데?"

  "그건 잘 몰라요, 그냥 그렇게만 들었어요."


  큰 애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다니엘이 입을 다물었고, 나 역시 궁금해졌지만 그 사람의 선택이고 그 사람의 인생이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 관심사 밖이었다. 그야말로 '넌 오브 비즈니스'였다.

  애들을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도 식을 하고 싶어."


  다니엘이 말했다.


  "왜? 질투야, 투정이야?"

  " 꼭 그렇게 말한다, 사랑이 질투고 투정이야?"

  "또 사랑 타령이다."

  "사랑 아니면 뭐야?"

  "나이 오십이 낼모레야, 이 아저씨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나랑 결혼 못해? 안 해?"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끝이 떨고 있었다.


  "다니엘? 엑스와이프랑 왜 헤어졌어?"

  "그거야, 쇼킹한 일이 있었다고 했잖아."


  다니엘의 전처는 미국여자였다. 현지의 교회와 연합한 합동 선교 사업으로 한국 교회를 방문한 미국 처녀에게 반한 다니엘의 적극적인 구애로 성사된 결혼이었다. 여자 쪽에서 다니엘의 밝은 에너지에 감동했고, 에덴동산처럼 사방이 초록으로 물든 그들의 동네까지 방문한 다니엘은 거기서 천사를 만난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하얗고 순결한 백인 소녀는 우리로 치면 도시물이 들지 않은 시골의 순박한 처녀였다. 옅은 노란색 머리와 에메랄드 빛깔의 눈동자, 어찌나 얼굴이 하얗던지 살 아래 박힌 자잘한 주근깨가 투명하게 들여다 보였다. 마치 호수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를 다니엘의 병원으로 데리고 들어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게 해 주었고, 틈틈이 레이저로 주근깨를 없애 주었다. 세 달이 지난 후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천사가 날개를 단 듯, 온통 투명하고 새하얀 얼굴로 변했고, 그런 그녀의 이름은 글자 그대로 앤젤리나였다.  

  문제는 그녀와 결혼하고부터였다. 처가가 캘리포니아 동쪽 지역으로 들어가는 목축지였는데, 다니엘의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을 프리웨이를 타고 올라가야 할 거리였다. 어느 날, 장인이 나타나 집안일 때문에 그녀를 사흘만 집으로 데려간다고 했고, 그러라고 한 후로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장인의 집으로 찾아간 다니엘은 깜짝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는 얘기였다.

  장인의 집에 들어서니, 키가 2미터는 족히 되는 그 동네 청년이 와서 목축과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저녁 식사를 하면서, 장인은 그 녀석을 다니엘에게 소개했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장인의 입에서 그 녀석을 분명 '선 인 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자기를 부른다는 걸 저 녀석으로 착각했겠지 하고 계속 장인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정말로 녀석은 그 집의 사위로 눌러앉아 살고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 보니, 그 마을은 모계사회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고, 남자들을 새끼 번식을 위한 씨돼지로 취급하거나, 집안의 일손쯤으로 보는 그런 쓸모로 사위를 결혼시켜 데리고 사는 것이었다. 우리로 치면 데릴사위 같은 풍습을 지키는 마을이었던 것이다.


  "황당했지, 그 길로 나왔어. 그래서 애 둘을 앤젤리나가 다 키우게 된 거야. 싹 데리고 간 거지."


  특이한  종교집단으로 그 지역에서 은둔하며 집단생활을 하는, 가족의 규모가 커져 몇 개의 성씨가 부락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렇게 어이없게도 신혼살림이 깨졌다.

  그리고 다시 한국여자를 또 만났다. 그 여자는 독립심 강하고 억척같이 자기 일을 하는 재기 발랄한 여자였다. 매사에 한 발 앞서 나갔고, 뒤처리할 것도 없이 일머리가 있어 완벽하고도 깔끔한 세 살 어린 여자였다. 다니엘이 서른다섯에 만난 이 여자는, 결혼하고 같이 살면서 보니 도무지 살 닿는 걸 못 참아할 정도로 다니엘을 피했다. 억지로 한번 자려고 하면 히스테릭하게 변하기 일쑤였고, 울고 훌쩍이며 섹스를 거부했다. 결혼 전 그것도 억지로 몇 번 몸을 섞어 본 것이 다였고, 신혼여행으로 크루즈를 타고 나간 하와이 앞바다에서 바람을 받으며 새벽에 아무도 없는 선실 통로 끝에서 갑자기 달아올랐던 한 번, 그게 다였다.

  그렇게 2년이 넘어가자, 다니엘이 먼저 이혼하자고 요청했고, 그 여자는 순순히 받아들이는 대신 재산의 절반을 요구했다. 용케 살만큼은 떼어 주고 합의했고, 헤어졌다. 그렇게 헤어진 후, 여자는 보란 듯이 30분 거리의 콘도로 이사를 왔는데, 버젓이 새남자를 옆에 두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남자와는 살이 물러터질만큼 둘이 붙어다닌다는 거였다. 원래 남편이라고 말이 돌기도 했다.


  "그렇게 여자들하고 살아봤잖아,  또 나하고 엮여서 어떤 꼴을 당하려고?"

  "당신은 그런 여자 아니잖아."

  "사람 정말 잘 믿는단 말이야. 그러니 사람 보는 눈이 없지."

  "그럼 내가 당신도 못 알아본 거야?"

  "그래, 나는 니 간을 빼먹으러 왔다, 꼬리를 보여줘야 믿어?"


  나는 다니엘을 향해 손가락을 오그라트려 할퀼 것 같이 두 팔로 허공을 긁는 시늉을 했다. 다니엘은 착한 사람이었다. 순해서 매몰찬 구석이 없는 사람, 자기 마음 같은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결혼에 대해 설명했다. 결혼은 한 사람하고 하지만, 하나의 독점은 다른 선택을 못하게 하는 독점권을 가진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독재고 폭력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자유를 고차원적인 수법으로 가스라이팅하는 것이 사랑이다. 난 그런 걸 믿지 않는다. 우리 둘만의 사랑이라고? 언제까지 우리 둘만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쳐, 하지만 나를 둘러싼 환경이 그런 날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넌, 두 번 실패했지? 왜 그랬을 거 같아? 남들이 너한테 몹쓸 짓을 해서 그런 게 아니야. 니가 그렇게 만들었어. 둘 다 니가 한 선택이었잖아. 이번에도 잘 생각해 봐, 감사하게도 날 선택한 것도 너야. 그렇게 선택은 일방적인 거야."


  난 한 번의 실패로 족했다. 두 번 실패하고 싶지 않았고, 그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와 실패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더욱이 이 사람과는 정말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나로 인해 만들어지는 고통을 전가하여 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상처 같은 칼자욱이 가슴 한복판에 시뻘겋게 그어져 있는 것, 그건 사랑의 실패이자, 새길수록 쓰린 피 흘린 흔적이었다.

  찌르레기가 열린 발코니 문밖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저녁이었다. 바다쪽으로 해가 지면서 서쪽이 온통 오렌지 빛으로 변했고, 마른 바람 거실 안으로 불어오면서 커튼이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다니엘을 데리고 발코니로 나가 서로 한 가치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새들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먼 하늘로 날아올랐다. 멀리 석양이 이쁘게 하늘에 번지고 있었다. 나는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연기는 바람을 따라 천천히 허공으로 사라졌다.


  "다니엘, 고마워 옆에 있어줘서."


  다니엘은 대답대신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내 어깨에 손을 얹고 함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둘이서 서로의 허리를 감고 말없이 담배를 피웠고, 정원수로 심어 놓은 단풍 나무 이파리들이 갈색으로 변한 모습을 내려다 보며 한참을 서 있다 들어오곤 했다. 사막에도 가을이 왔던 것이다.  

  아이들도 없는 텅빈 저녁, 역시 찌르레기는 울었고,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실 안쪽으로 붉은 노을이 슬며시 고개를 밀어넣어 다니엘의 얼굴이 붉은 노을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전남편에게 받은 결혼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서 다니엘의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이걸 받아줘. 잊지 않을게. 지난 과거와 지금 당신, 그리고 우리의 미래, 이건 내가 당신에게 주는 내 프로 포즈야."


  그는 전남편이 내게 끼워준 반지를 받아 자신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혼인신고 없는 우리들의 신혼 첫날밤, 허니문은 그렇게 시작했다.


이전 17화 이혼, 남자를 바꾸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