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낮은 초록 동산들이 텔레토비하게 펼쳐진 한적한 동네였다. 주변에 큰 산의 자락도 없었고, 넓은 개활지가 지평선으로 죽 이어져 있는, 숨길 것도 없고 숨을 데도 없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정물 같은 동네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목축을 한다고 말뚝을 박고 철조망을 쳐놓은 경계도 없었고, 한가롭게 소들이 풀을 뜯는 모습이 멀리서도 지루하게 보이는 캘리포니아 먼 땅의 끝, 지평선 너머에 있을 것 같은 마을이었다. 띄엄띄엄 초원 위에 던져진 집들은 나무판자를 외장으로 촘촘히 가로 겹으로 덧대거나 판판한 돌을 반듯하게 쌓아 벽체를 쌓아 올린 동화 속 그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박공지붕의 각도는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의 성품만큼이나 반듯하고 정갈했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캐빈하우스 같은 집이 앤젤리나의 집이었다. 거의 15년 만에 온 것으로 기억되며 오늘로 네 번째 방문이었다. 결혼 전, 결혼 후, 그리고 아내를 찾아보기 위해, 그리고 이혼 후 지금이다. 아이들의 존재를 정혜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어딘가 내 아이들이 크고 있다는 것을 정혜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내 생각을 말했을 때, 선뜻 정혜가 함께 가보자고 했던 것이다.
정혜는, 남편과 이혼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정확히 변화의 계기가 된 일은 전화를 통해 드러난 내 목소리 때문에 한국의 남편에게 발각된 사건이었다. 그 일 이후 안절부절 못하던 정혜는, 미국에 돌아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불안정했고, 거기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은 시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너무도 좋은 분이셨어, 내가 가야 했어, 내가..."
새벽에 부고를 전해 들은 그 시각이후로 정혜는 괴로움으로 꼼짝 않고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꼭 가야 할 자리였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 자리라고 짐작됐다. 한국에서 장례절차가 끝나고 바로 몇 날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돌아왔고, 아이들을 통해 상가의 분위기, 남편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해 듣는 듯했다. 아이들은 아직 부모의 관계가 깨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던 때여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왔다.
"삼촌이나 고모가, 왜 엄마는 안 오냐고 그러던 걸? 아빠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게 다야, 그리고 할아버지들이 오셔서 엄마 찾고 그랬는데, 아빠가 뭐라 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그만이었어. 정말 엄마가 왔어야 하는 거 아냐?"
정혜는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할아버지의 영정사진 모습을 전해 듣고 슬피 울었다.
"할아버지 정말 좋으신 분이었어, 그렇지?"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정혜를 안았다. 그렇게 날이 가면서 모두 저마다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이들 모르게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점차 안정을 되찾는 듯 보였다. 한국의 상황이 조금씩 정리되면서 정혜와 나의 관계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생때같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작은 애가 어느날, 정혜에게 물었고, 누가 그런 말을 쓰더냐고하는 물음에, 할머니라고 답했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자는데, 누가 막 울어서 깼거든, 근데 할머니가 그러는거야. 생떼같은 내 새끼를 버리고 갔다고..."
자신을 가리키는 화제였다는 걸 짐작한 정혜는 단어의 뜻을 말해주고, 말을 돌렸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엄말 싫어해서 하시는 말씀이야."
좌불안석의 한국체류, 돌아온 미국, 시아버지의 부고, 시어머니의 힐난, 거기에 남편의 분노는 컴퓨터를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했다. 말할 수 없는 무게의 짐을 진 것처럼 정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자이언 캐년의 숙소에서 나는 그녀의 놀라운 변신을 목격했고, 그건 나를 타겟으로 한 공격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고 겁에 질리기까지 했다. 달라진 그녀의 눈빛은 시종일관 나를 리드했고, 시작과 끝을 컨트롤하면서 나를 움직였다.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포즈에서조차 나의 모션을 요구했고, 어떤 때는 지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렇게 주도권을 가져간 그녀는 나의 남자로서의 권력과 대립하는가 싶었지만, 그건 공격을 받는 순간에도 반사적으로 공격하는 전방위 공격수의 역할 수행과 흡사했다. 공격성은 과격함으로 이어졌고, 그런 과격한 제스처들이 내면화되면서 그녀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안정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봐, 몰랐던 것들이 막 올라와. 내 손을 잡아, 그렇게, 나를 당겼다가 풀어, 그렇지, 그래 그렇게.."
그녀가 가진 능력은 여성이 엄마로서 가지는 배려와 포용에 가까웠다.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를 움직이는가 하면, 특정 행위를 요청하고나서 결과에 대해 나를 자랑했다. 그녀에게 대화와 소통은 나를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강하게 어필하는 도구였다. 아닌 것은 분명히 아니라고 선을 그어 주었고, 충돌되는 부분은 자신이 리드하는 방향으로 끌어갔다.
정혜가 가진 남녀의 삶, 결혼의 방식에 있어서도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실패 뒤에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있었다는 것, 그와 동시에 배우자 몰래 다른 짝을 찾았던 내면의 죄, 이런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인정 안에는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정의 사실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더도 덜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그때마다의 감정에 충실했던 일,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몸이 그것을 원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하는 떳떳한 존재이유였다고 밝히자는 것이다. 내가 두 번의 결혼으로 전처가 두 명이 있다거나, 정혜가 남편 말고 관계를 맺었던 남자가 둘이나 더 있었다거나 하는 일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이유들이므로 이런 일에 대한 부정과 거부는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몸짓일 뿐, 어떤 변명과 합리화도 나를 당당하게 만들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던 말들이 되려 나에게로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처 방문 순례가 이어졌다.
"있었던 일을 부정하면, 나쁜 애가 되어 버리잖아. 받아들여. 남편이 있는 날 자기가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야."
종교적 체험에 가까웠다. 몰랐던 것에 대한 각성, 신성한 봉인이 풀리고 그 신비스러운 세계로 이끌려 가는 것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말과 그 속에 담긴 생각과 마음을 받아들일수록 나는 그녀의 진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앞서 가는 그녀는 마치 성녀와 같았다. 차별 없이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성녀처럼, 내 눈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컴온인, 컴온인, 사위."
장인은 내가 가르쳐준 '사위'라는 한국말을 잊지 않고 사용했다. 집안은 예전 그대로였다. 문 하나짜리 둥글둥글하게 생긴 옛날 냉장고가 부엌 오른쪽에, 기계식 전화기가 그 옆의 벽에 걸려있었고, 낡은 싱크대 옆으로 그릇과 접시, 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석탁 뒤쪽 벽에는 퀼트로 수놓은 큰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이 마을의 전경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장인에게 정혜를 새 아내라고 소개했고, 이내 장인은 반가운 얼굴로 환히 웃으며 정혜를 포옹하며 반겼다.
어떤 걸 마시고 싶냐는 장인의 말에 정혜와 나는 간단히 커피라고 답하고, 가리켜준 테이블에 둘이 나란히 앉았다. 장인은 우리 둘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고, 정혜가 땡큐라고 답하며 동네 풍경이 아름답다고 응답했다. 그렇게 장인과 정혜는 서로의 표현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고, 금세 친해진 사람처럼 허물없이 밝은 표정으로 대화했다. 그런 정혜의 모습이 마주하고 있는 모두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커피를 마시는 중에 문이 열리며 앤젤리나가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2미터의 큰 키가 따라 들어왔다. 큰 키의 눈빛이 흔들리며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도 미소를 머금은 앤젤리나가 내게 다가와 안부를 물었고, 늘 그냥 그렇게 변함없이, 그러나 나는 즐겁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답했다. 그녀는 정혜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뉴와이프'라고 답했다. 옆에 있던 정혜가 내 말을 수정했다.
"어 뉴 걸프렌드. 올모스트 와이프."
앤젤리나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안았고, 정혜도 그녀를 반갑게 안았다. 그렇게 나는 전전 아내와 재회했고, 이제는 중학생이 된, 두 아이를 식탁에 마주 앉아 대면하게 되었다.
테이블에는 장인이 가운데, 오른쪽 사이드에는 앤젤리나 부부가, 왼쪽 자리에는 정혜와 나, 그리고 아이들이 넷, 내 아이 둘과 큰 키의 아이 둘이 더 세상에 나와 있었다. 접시가 돌고. 그릇이 오고 가면서 꾸덕한 바질 버섯 수프가 나왔고, 황소고기 스테이크 한 점, 토마토 베이스에 양고기를 끓인 위에 브로콜리를 얹은 스튜가 나왔다. 그리고 각종 푸성귀가 한가득 담긴 보울 샐러드가 일품이었다.
소가 풀을 잘 안 먹는다, 채소 농사가 잘 안 된다, 약을 치는 일은 우리식 농사가 아닌데 관리하기가 힘들다, 유기수 물공급이 문제다, 등등의 이야기를 큰 키의 사위와 장인이 나눴고, 마트에 가서 생필품이나 과일 조미료 같은 걸 더 사 와야 한다고 앤젤리나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듯 말했다. 한쪽으로 정혜와 나를 번갈아 보며 '이렇게 끼어들지 않으면 말할 기회가 없다'고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는 천사, 앤젤리나였다.
한 개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나는 놀라운 내면적 경험에 가 닿았다. 전처와 '새 여친'이 서로 통성명을 하고,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 장인이 새여친과 인사하고 사위의 새 출발을 축복한다, 이 모든 포즈, 행동 양식들이 자연스럽다, 이들 중 누구도 원한이나 시기 질투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이런 현실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는 사실, 놀라운 성장이었다.
바깥 테라스에 나와 정혜와 나는 담배를 피웠다. 나무로 된 난간에 깡통을 하나 걸어두고, 이 집 누군가 여기서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모두 유기농 농사를 하는 집단 공동체였다. 담배농사를 하는지도 몰랐다.
흔들의자가 하나, 그 옆으로 낡은 소파와 등받이가 머리 위까지 올라오는 왕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정혜가 흔들의자에 앉아 발을 굴렀다. 앞뒤로 흔들리며 정혜는 담배연기를 허공으로 뿜었다.
"괜찮지? 언젠가 한국에 있는 전남편 하고도 이렇게 만나게 해 줬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가면 가만 안 둘 걸?"
"가만 안 두면?"
"글쎄, 뭔가 일이 터지지 않을까?"
"죽이기라도 하겠어? 내가 그렇게 죽을 짓을 한 건가? 너도 죽어야겠네?"
지난 얘기들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만큼 우리 둘은 용감해졌고, 그만큼 일상으로 돌아와 처음의 충격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된 듯했다. 나는 정혜에 대해 죄책감을, 정혜는 전남편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우리 둘은 죄인이라는 공동의 타이틀을 함께 부여받았고, 그 죄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집을 나와 해변으로 나갔고, 바닷가에 차를 새워 놓고 해변의 끝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파도가 치는 밤바다에 나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따라 걸어가 데크를 떠받치는 나무 기둥들 사이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그러다가 밀려오는 파도에 정혜의 울음소리가 섞여 실려나갔다. 빨갛게 타들어간 담배를 모래 속에 쑤셔 넣으며 일어서는 정혜의 어깨에는 말할 수 없이 슬픈 것들이 걸려 있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 없이 갔다가 해변에서 마신 술로 돌아오지 못하는 밤, 근처 콘도를 빌려야 했고, 다음날 새벽까지 검은 어둠에 삐죽삐죽 솟은 팜트리들의 그림자를 뒤로 하고 해변으로 걸어나가 술을 마셨다.
"너, 다니엘, 지금까지 관계한 모든 여자들을 다 부를 수 있어? 나도 만났던 남자들을 다 불러서, 게스트하우스 잡고 한꺼번에 다 자보면 어떨까? 동시에 말이야, 그게 가능할까? 할 수 있는 일일까? 하려고 맘먹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로 한 명 한 명 애인을 만들어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로 간직하면서 그렇게 가슴 졸이는 것보다, 커밍아웃을 하는 거야, 애인 커밍아웃, 나 애인이 있다. 너는 없니? 그렇게 한꺼번에 오픈해서 만나는 거야. 앤젤리나처럼 말이야, 그쪽 커플이나 우리 커플이나 다를 게 뭐가 있겠어? 전남편에게 현남편이 있고, 전남편의 현여친도 있잖아. 우리 다 함께 만나서 같은 자리에서 즐겁게 이야기했잖아. 왜 함께, 다 함께 같은 자리에서는 못 지내는 거지? 왜 한 명씩 따로따로 봐야 하는 건데?"
정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취했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들을 주절댔다.
"평화롭고 싶어, 마음이, 이 내 속이 그냥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이 되어 버렸으면 좋겠어."
침울해진 정혜를 남겨놓고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갔고, 정혜는 내게 그녀의 결혼반지를 건넸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았고, 우린 결혼했다. 정혜는 내가 준 반지를 정식으로 다시 꼈고, 나는 그녀의 반지를 왼손 새끼에 꼈다.
첫날밤을 보낸 정혜의 집을 나와 시내 사진관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의자에 앉고 정혜가 서서 내 어깨에 손을 짚고 선 사진 한 장, 그 반대 포즈로 한 장,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얼굴을 맞보는 사진 한 장, 서로 안고 마주 본 상태에서 카메라를 쳐다보고 한 장, 그리고 캐주얼하게 정혜가 내 등에 자기의 등을 대고 카메라를 향해 한 장, 정혜가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장면 한 장, 그리고 정혜는 사진관을 나오면서 2년 237일이라고 사진 하단에 글자를 새겨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손글씨를 주인에게 써주며, 자신의 글씨로 꼭 프린트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진관 주인과 촬영기사, 회계직원 등이 일하는 사진관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가 빠르게 한인 커뮤니티에 퍼져나갔다. 정혜와의 소문이 다시 내 귀로 들리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새 정혜 씨하고 신혼에 젖어 산다며?"
친구들이 전화를 해댔고, 집들이는 언제 하냐는 전화도 빗발쳤다.
"남이 먹던 거 뺏어먹으면 그렇게 맛있더라."
이렇게 비아냥 거리는 놈도 있었다.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했고, 정혜는 그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 여기 원장도 날 보는 눈이 달라졌어, 뭔가 헤프게 보기도 하고, 여기 간호사들도 지들끼리 킥킥 웃어대긴 마찬가지야. 상관 마, 지들 인생이나 잘 살라그래, 지들 애인들이나 잘 간수하라고!"
나를 부르는 호칭을 '자기'로 바꾼 정혜는 좁디좁은 한인 커뮤니티에 매몰차게 대응하는 다른 수를 내는 것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이든 유부녀를 유혹한 외국인 한국인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 호색한이 되어 있었고, 더군다나 한국의 남편과 담판을 짓고 여자를 빼앗아 사는 힘좋은 능력남이라는 말에는 혀를 내두를 저도였다. 정혜역시, 한국에서 남자관계가 복잡해서 삶이 순탄치 않은 차에 미국행을 선택했고 여기 와서도 개버릇 남 못주고 꼬리를 치고 다니는 꼬리 아홉달린 여우로 변해 있었다.
"소문의 반은 맞는 말이네. 여러 여자, 여러 남자 거쳤잖아. 그럴수록 더 고개를 들어, 자신 있게 나가. 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일 거야. 자기도 그렇게 살아. 자신감이 모든 걸 덮어줄 거야. 어딜 가도 상처는 우리가 받는 거란 걸, 명심해."
나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3개월 6개월, 1년이 지나고 남들의 시선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 버렸고, 일상은 흔들림 없이 계속 됐다.
앤젤리나와 1년, 병원에서 회계를 보다가 만난 한국여자 캐서린과 2년을 산 것이 내가 여자와 함께 산 이력의 전부다. 그리고 그 이별의 충격으로 3년의 시간이 흘러갔고, 정신차리고 보니 9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어느날 갑자기 정혜가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말 그대로 그녀는 갑자기, 어제까지만 해도 흑백화면이었던 시야가 한 순간에 컬러풀해지는 경험을 한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은은한 후광이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부터 그녀를 감싸 흘렀고, 단박에 한순간으로 나를 사로잡은 여자였다.
그녀에게 아이가 둘이 있다든지, 한국에 남편이 있다는 그런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정혜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혜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법같은 흡인력이 있었다. 말투가 그랬고, 미소가 그랬고, 손가락끝에서 살짝 부풀어올라 동그랗게 투명한 살빛이 그랬다. 마르고 가녀렸지만 강단 있는 눈빛과 굽지 않고 똑바르게 뻗은 다리가 나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말할 때마다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줄기와 가지런한 치아선, 그 속에 붉게 움직이는 혀까지 나를 괴롭힐 만큼 힘들게 만들었다. 그런 때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었다.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을 때까지, 땀이 뚝 뚝 떨어질 때까지 나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정혜를 향한 마음을 숨긴 채, 그녀 옆을 3년동안 지켰다. 그렇게 그녀 옆에 머물던 어느 여름 날, 그녀가 강마른 남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시험준비가 지지부진하던 정혜를 한인 병원의 간호조무사 자리를 알선해준 내게 감사하는 자리에 남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를 남편으로 착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대학 후배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가 시내에 호텔을 잡고 정혜의 집을 출입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알지 못할 배신감과 함께 그 남자에게는 질투심이 불같이 일었다. 그러나 내가 어찌 할 수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처음에는 십오일, 나중에는 한달 가량 엘에이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갔다. 일년을 그렇게 보내고, 다시 그남자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놀라운 것은 남편의 방문도 주기적으로 반복됐고, 용하게도 그 둘의 방문이 겹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
한마디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던 거였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녀 옆자리를 나도 한자리 차지하게 된 날, 나는 기뻐서 어디가서 춤이라도 춰야 할 심정이었다. 내가 늘 그녀를 갈구하며 추었던 춤들을 그날 그녀 집의 욕실에서 내가 추게 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우린 계약된 커플들인 것처럼, 한 명이 오면 한 명이 나갔고, 또 한 명이 나가고 나면 그 자리에 또 한 명이 들어갔다. 그래서 누구는 누구의 존재를 몰라야 했고, 누구의 존재를 아는 누구는 또 다른 누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남은 자는, 유일하게 정혜 옆에 남은 남자는 '나'였다. 이걸 승리라고 해야하는지, 생존이라고 해야할지, 한국인의 끈기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러 남자들 중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자, 나, 다니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