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거머쥔 머리는 머리대로, 내 사지와 몸통은 제각기 분리되어 흩어졌다. 내 존재를 감지할 수 없는 머리도 어딘가 어둠의 정점에 떠 있었고, 나는 완전히 무방비상태의 진공에 빠진듯했다. 몸을 이탈한 내가 나를 내려다 보았다. 어둠 속에 찡그린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었다. 고통에 잠긴 얼굴로 어떤 소리도 내뱉을 수 없는 극한의 공포에 빠진 눈으로 입을 쩍 벌린 채 손은 갈퀴가 되어 남자의 등을 긁어내렸고, 두 다리는 허공을 차고 올라 그의 허리를 옭죄었다.
언뜻 고통이 희열로 번져나는 듯도 보였다. 두 개의 감정이 묘하게 교차하는 순간 순간을 표현할 어떤 표정도 나타낼 길이 없었다.
남자가 문을 열자 피아노 줄을 때리는 건반은 조용히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동굴 아래로 떨어지는 석수가 메아리로 울리듯, 조용하고 정확하게 똑똑 음계를 눌렀다. 배경으로 깔렸던 오케스트라는 침묵했고, 마지막 건반이 힘없이 툭하고 떨어지자 세상은 고요 속에 묻히는 듯했다.
큰 아이를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그 남자를 생각했다. 내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이 불꽃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됐고 나는 목금토가 되기를 학원대기실에 앉아 기다렸다. 일주일에 한번씩 시간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러면서 남편을 향한 마음은 완전히 닫혔고, 나는 내 삶을 살기 시작했다.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새 얼굴에 뭐 했어? 생기가 도네?"
희경언니가 카페에서 내 얼굴을 쓸며 말했다.
"어머, 촉촉하기까지 하네? 진짜 나 몰래 뭐 했어?"
언니에겐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목금토에 나머지 공부학생이 된 것에 대해 말했고, 언니는 입을 틀어막으며 놀랐다.
"정말, 소문이 맞았구나, 그 선생 대단하다고..."
그러면서, 언니는 우울하게 지냈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고 했다.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배신감이나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그의 곁을 떠났고, 타국에서의 2년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방편은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6개월 전 현지에서 만났던 중개업자와의 관계도 어디에도 정 붙일 곳이 없었던 내 마음의 징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도 실컷 남자 맛이나 보고 돌아가자는 심산으로 그 남자에게 달라붙었고 그 남자는 굴러들어 온 떡처럼 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남자를 두고 한국으로 들어왔고, 정신없이 아이들 학원을 돌았다. 그때 희경언니가 나타났다. 다시 침체되는 몸은 어쩔 수 없었고, 다시 우울증에 빠지면서 말수가 줄고, 입맛이 없어 몸에서 5킬로가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내가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어서, 술이나 한번 실컷 마셨으면 원이 없겠다는 생각에 젖었고, 답답한 가슴을 두드리며 누웠다가 앉았다가 하는 하루를 보냈다. 다행히 선천적으로 술은 입에도 대지 못하는 체질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욕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밥을 먹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하는 날이 계속 됐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희경언니가 집으로 들어왔고, 자기가 먹는다는 안정제 몇 알을 건네주었다. 그걸 먹고 잤고, 눈 뜨면 국물을 한 대접 마시고 다시 그 약을 먹고 잤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자, 그러지 말고 애들 논술선생이나 만나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고, 언니와 함께 논술 선생을 만났던 것이다.
그가 나를 깨워 주었고, 나는 눈에 뜨이게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고, 식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얼굴빛도 돌아와 생기가 돈다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다. 건강이 돌아오는 것을 몸으로 느낀 나는 더욱 그에게 매달렸고, 어김없이 3일을 그의 집 2층방에서 머물렀다. 논술 숙제가 없어 가지 못하게 되는 날은 내가 안달이 났고 아이를 다그치기까지 했다. 어서 하나를 더 써보라고 닦달하여 다음날 어김없이 그에게로 갔다. 아이를 다그치지 못한 날은 아예 선생에게 과제를 받아 왔고, 첨삭을 위해 딸 애를 데리고 왔다가 이제는 아예 아래층의 딸애가 거추장스러워지면서 첨삭을 시험지에 직접 해달라고 요청했고, 그걸 되가져가 딸애에게 공부하도록 시켰다. 수업방식도 3일은 첨삭지도 수업으로 바뀌었고, 나머지 3일은 쓰기로 정착되었다. 쓰기 3일은 내가 2층 방에 머무는 삼일로 비워두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6개월을 그와 함께 지내면서 나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다. 더욱이 큰애가 서울대학에 합격하고 난 후 내 기쁨은 더없이 충만했고, 그에 대한 내 충실도는 완벽한 믿음으로 정착했다. 그에게 작은 애도 맡기면서, 그와 일 년을 더 지냈고, 나는 완전히 그의 여자가 되어 옆에서 사는 여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3일 첨삭수업과 3일 쓰기 수업의 일정을 소화했다. 그건 우리 둘이 지켜야 하는 철칙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정착된 룰은 작은 애가 다시 합격하기까지 꼬박 1년을 변함없이 지켜낸 시간이었다.
다시 여관 앞에서 정호엄마와 선생을 봤을 때, 눈이 돌아가는 줄 알았다. 나는 이성을 잃어버렸고, 그 여자는 어떻게 차를 몰고 줄행랑을 쳤는지 몰랐다. 나 역시 그 길로 골목을 빠져나오고 선생과의 인연도 끊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급격히 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의경언니가 건네는 우울증 약을 먹었고, 잠을 잤고, 눈을 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들은 대학생활에 젖어 집에 붙어 있지 않았고, 남편 역시 변함없이 출장이 잦았다. 혹시 몰랐다. 지금도 좋은 사람으로 호평을 받으며 젊은 여자들에 둘러 싸여 지내고 있는지, 그건 내 관심밖이 된 지 오래였다.
희경언니가 매일 집에 들러 내 밥을 챙겼고, 상담가답게 필요한 말만 하면서 내 이야기를 힘겹게 들어주었다.
사람이란 것, 그 생물이 가지고 있는 비논리적인 몸의 세계는 납득도 되지 않을뿐더러, 받아들일 수 없는 폭력적 성향이 짙었다.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어 하면서도, 너만은 내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이기심은 아집으로 남아 타인을 지배하는 것을 즐겨했다. 겉으론 평화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이면서도, 내면의 세계에서는 폭력과 시기 질투, 용납되지 않는 타인의 영역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모순과 역겨움이 교차하는 몸덩어리였다. 그것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만 존재했고,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욕망도 드러냈고,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비굴함도 참아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숭고한 정신을 숭모하는 뜻에 함께 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몸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인지, 인간의 이런 상태가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이 껍질을 벗어버리고, 이 모순형용과도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유일한 방법은 머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유디트가 호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르듯 그렇게 냉담하고 비인간적으로 하나의 생명을 끊어 내야만 했다. 나는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11층 높이의 더운 공기가 확 얼굴에 끼쳐 들었다. 안에는 차가운 공기가 흘렀고, 밖에는 한여름이 뙤약볕이 있는 훈증의 세계였다. 이렇게 공기의 층도 서로 달랐고, 그 가운데 공기가 뒤섞이는 한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그건 마치 양수리에서 두물이 합쳐지는 것과도 같았고, 남대천이 강릉 앞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것과 같았다. 아파트 숲이 눈 아래 보였고 사람들이 꿈물거리며 움직였고, 길을 따라 차들이 천천히 내려갔다. 머릿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그 목소리는 나를 재촉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을 뻗었다. 난간을 잡고 몸을 세웠다. 더운 바람이 온몸을 덮었다. 머릿속의 그 목소리는 어서, 어서, 여기서 나가자고, 나가야 한다고 절규했다, 그리고 나는 난간 위로 몸을 세웠다.
눈을 떠 보니, 119에 실려 온 응급실 침상이었다. 옆에서 희경언니가 나를 흔들었고, 정신이 드냐고 내게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희경언니를 올려다봤고, 굉장히 멀뚱한 상태였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 덤덤한 상태였다.
밤이 되었고, 나는 입원병동으로 옮겨졌고, 아이들이 들이닥쳤고, 남편이 들어왔다. 그렇게 사태는 안정되었고, 다음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에 희경언니가 상담사 자격으로 치료과정을 보장하며 집으로 데리고 나왔다.
눈을 감아도 잠들지 않았다. 내가 하려던 것들이 조금씩 생각이 났고,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 올라왔다. 울었다. 숨죽여 울었다. 세상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작은 방의 요 위에서 나는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생명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빛을 잃었다. 내가 지키려고 했던 원칙과 질서가 무너졌다. 그렇게 굳건했던 도덕관념도 부질없는 약속처럼 변해버렸고, 내겐 아무것도 지켜내야 할 어떤 보호막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경계 없는 넉넉한 마음 하나로 족했다. 세상은, 이 우주는 불가피한 존재들의 영속이었다. 그 속에 부질없는 내가 살고 있었다. 무엇을 할 수도, 무엇을 하고 싶지도 없은 텅 빈 나만이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철호를 만났다. 그가 내게로 왔다. 내게 온 그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전국을 돌았고, 자고 먹고, 차를 타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도 나와 같은 심정일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우리 둘은 서로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일상이 아무런 막힘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이었다. 해운대에서 용호동으로, 영도에서 감천으로, 을숙도와 명지 사구를 지나 산업단지, 가거도, 거제도를 잇는 대교를 넘었다. 통영의 다찌에서 살아있는 해산물과 횟감에 지친 몸을 풀고 동쪽을 바라보는 창문을 통해 해 뜨는 창열한 광경을 보았다.
고성 삼천포를 뚫고 들어가 남해를 돌아 하동에 이르렀고, 섬진강 줄기를 따라 남도 칠백 리 길을 함께 걸었다. 지리산 자락 피아골과 뱀사골로 들어가 숲 속을 걸어 고개 너머 인적이 없어질 즈음 골짜기를 돌아 내려왔다. 내 몸속에 잠겨 있던 퀴퀴한 기운들이 맑은 공기에 씻겨 내려가고 만나는 사람마다 주고받는 기운이 나를 일깨웠다.
벌교를 지나 화순의 운주사에 들었다. 지나가는 거리에 버려진 돌처럼 불상들이 주섬주섬 서있었고, 엎어져 있던 것을 세운 녀석부터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녀석들이 이 쪽에 저 쪽에 올망졸망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아이들의 장난 같은 전시처럼 길을 장식했다. 이것들은 마치 저 언덕 너머 바위를 파내서 와불ㅇ라고 부르는 불상들이 뜯어져 나가면 이런 모습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누운 불상 위로 관광객들이 군데군데 서서 사진을 찍었고, 철호와 나도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건네고 사진을 찍었다. 뜯겨 나간 불상들은나의 파편과도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조각 하나도 투박하게 깎은 솜씨가 예쁜 모습 그대로여서 듬뿍 정이 가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쭉하게 경내로 들어가는 길 끝에 대웅전이 자리했고 그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들이 3월의 진달래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저 어디 동산 중턱에서 머리 큰 동자부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다 낡아 깨지고 문드러졌지만 순진무구한 모양으로 살아남은 저들의 얼굴들, 그것들은 내 몸이었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형체 없는 내 마음들이었다.
순천 읍으로 나가 방을 얻었고, 주인할머니가 비워준 안방에 엎드려 나는 처음으로 울었다. 철호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입을 벌린 채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나는 남편과 절대로 헤어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고, 설사 어떤 일이 있더라도 누굴 다시 만나 인연을 맺진 않으리라 다짐했다. 모든 것이 뜬구름 위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들이었다. 한 때의 즐거움이 더한 쾌락으로 발전할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두고 보는 일이 내게 남아 있었고, 철호와 남은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철호의 아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도 나는 철호와 함께 슬퍼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아파하는 모습에 물들어 함께 울었고 보살폈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완전하게 회복되었고, 이제 다시 내 것을 채우기 위해 헛된 상상으로 나를 상처 내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는 일도, 누가 누구와 하나가 된다는 망상으로부터도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 됐다. 나는 내 몸으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는 일에 고통스러워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철호는 이혼했다. 혼자가 된 그를 난 감당해 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는 나를 찾았고, 그에게서 아픔이 내게로 넘어 올 때 나는 철호로부터 조금씩 멀어져야만 했다. 지켜야할 가정이 없어져버린 남자와 깊은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것은 알량한 도덕이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길을 가지 못하는 내 마음을 그에게 다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고, 그와 난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 같은 강한 끌림때문이었다. 그런 예속적인 인연을 맺지 않으려는 내 마음은 의지로 굳어졌고, 그 때로부터 그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문자 수가 줄었고, 통화수도 줄면서 차츰 서로를 밀어내듯 몸도 마음도 멀어져 갔다. 다른 내세의 인연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들 나에게 그 인연이 닿을 일은 없을 거라 믿으면서 철호를 축복했다. 그래도 그와는 시작도 끝도 없이 관계를 열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서로를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 한줄기 흘려줄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그가 내민 손을 내가 잡을 수 밖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고, 어쩌면 나는 그 때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기다림은 내게 간절한 시간으로 고스란히 내 속에 남아 나를 조금씩 먹어들어왔다. 사라졌던 고통이 새로운 형태의 질감으로 내 속에 상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작별을 고한 그의 허물어진 몸 앞에 마주서기에는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었고, 그러기엔 그의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런 책임감같은 감정들이 나를 더 먼 곳으로 물러나게 했다.
집전화가 울렸다. 남편이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저편에 응답이 없는 그 전화는 끊어졌고, 다시 걸려온 전화를 큰애가받았을 때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신자의 공허하고 다급한 ‘여보세요’ 소리만 거실에 울려 퍼졌다.
작은 방에 앉아 있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계속 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계속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전화기 너머의 침묵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했다.
‘내일 집앞으로 갈게, 예쁘게 입고 나와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