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년의 세월이 흐르고, 다시 해가 바뀌면서 무더위로 숨을 못 쉬게 하는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정혜는 대행업체를 통해 주기적으로 이혼을 요청했고, 나는 순순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내가 먼저 둘 사이를 정리할 수 있는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요구에 따라 내가 움직인다면, 나는 그냥 바보로 전락하고야 마는 굴욕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일반적으로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정혜를 쏘아붙였다. 정혜가 요구하는 모든 일정을 거부하고, 일정을 새로 짰다. 이건 최소한 내가 주도해야 하는 게임이라고 확신했고, 그 게임은 내가 총을 내려놓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게임이라고 못 박았다.
정리할 시간을 벌었고 가을이 왔다. 부동산을 시세로 처분하는 것에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고, 다음 해 6월에 정식으로 이혼했다. 정혜 없이 혼자 출석한 강남의 가정법원은 만원이었다. 내 나이보다 어린 부부들이 아무 말 없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누구도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누구와 대화할 사람이 없는 낯선 공간에 앉아 기다렸다. 거기엔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치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는듯했다. 완전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죽었으나 저승에 가지 못한 사람들, 잠시 스쳐 지나갈 간이역에 내려 지난날을 돌아보며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이 법 앞에 서게 되고, 법이 자아를 판단하고 결정할 시간을 사람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담담히 기다렸다. 깨끗한 양복을 꺼내 입은 남자들과 우아한 양장으로 차려입은 여자들이 짝을 이루어 앉아 있는 모습들은 바깥세상과는 다른 이질적인 풍경처럼 보였다.
정혜가 다녀간 이후, 그녀만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떠났고, 혜연도 역시 때를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한꺼번에 세 사람을 잃었던 것이다.
정혜와 아버지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혜연의 경우는 이해할 수 없는 이별이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지속적으로 만남을 요청했고, 집요하게 그녀 주변을 맴돌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 두 번의 음주운전이 적발되면서 벌금과 징계처분에 휩싸이는 생활 고통을 겪었다. 두 번째는 가중처벌되어 학교는 물론 금전적으로도 타격이 컸다.
차라리 잠시 쉬자는 생각으로 학교에 휴직계를 냈고, 일 년만 쉴 요량으로 집에 들어앉았다. 글 쓰던 절간에도 찾아가 보았고, 동해 쪽으로 차를 타고 목적 없이 쏘다니기도 했다. 그중에는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도 있었다. 집이 있던 자리에 빌라가 들어섰고, 동네 입구 아랫마을은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린 오래된 동네였다. 남은 것이라곤 등고선 하나였다.
그 골목들을 오가며 옛날의 집들을 떠올렸다. 기정이, 태련이, 용호, 광수, 이런 애들의 이름을 부르면 그네들이 어디 골목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언덕 끝에 설치된 난간에 기대어 하염없이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언덕 비탈을 내려가 큰 도로를 만나면, 다시 그 도로는 더 아래의 더 큰 도로와 만났고, 그렇게 더 아래로 내려간 도로의 끝에 솔밭이 나왔고, 솔밭 너머엔 바다가 있었다. 먼 데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귓전에 와닿는 것은 바다가 사람을 부르는 소리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로 나갔다가 50이 넘어 집으로 돌아와서 육지에 정착한 아버지였다. 말이 없고, 매사에 무덤덤한 분이었다. 누구에게 한 번도 살가운 말을 해본 적이 없었고, 평생을 당신의 자리만 묵묵히 지키신 분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들고난 흔적이 없었다. 장례를 치르면서도 한 방울의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존재는 옛날부터 있어도 없는 것 같았고, 없어서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속의 존재였던 것이다.
혜연의 동네, 그녀와 걸었던 프린스 여관 골목 뒤를 돌아, 막다른 끝에 커피숍이 있었다. 안정된 표정으로 나를 맞은 주인 여자는 안 쪽의 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문을 열자 혜연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그녀 앞에 앉았던 여자가 일어났다.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혜연의 아파트 입구에서 내 차의 창문을 두드렸던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나는 말없이 그녀가 일어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생머리의 여자는 혜연 쪽으로 건너가 혜연 옆자리를 두 칸 띄워 떨어져 앉았고, 나는 정확히 혜연 앞에 앉아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여긴 흡연가능 하니까 피셔도 돼요. 그럼 저부터 한 대 필게요."
여자가 우리 쪽에 양해를 구했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가치 빼든 여자가 담뱃갑을 우리 쪽으로 밀어주었다.
"본론부터 말할게. 우린 여기까지여야만 돼."
혜연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이별의 당위성, 그 말속에는 그녀의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헤어지기로 한다거나,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외부의 요인으로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말로 이해됐다.
"왜? 시점이 꼭 이래야만 됐어?"
혜연은 슬픈 눈빛이 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49재가 가까워오면서 절에서 올리는 재에 혜연과 동반하여 참석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런 생각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남의 마음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그녀는 남편이 있고, 다 큰 자식들이 있는 가정의 주부였다.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관계, 혜연과 나는 불륜이었다.
불륜, 불륜이라는 말이 입속에 맴돌면서 혜연과 나 사이의 관계가 선을 긋듯 확연해졌고, 그 선은 윤리의 선이 아니라 사회의 선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 윤리나 도덕의 문제는 순전히 개인 문제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윤리나 도덕을 강제하는 것의 본체는 사회적 구속력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모든 윤리 도덕의 문제는 사회적 구속력이 더 강하게 작용되는 것으로 귀결되는 대한민국사회의 아주 유니크한 특질이었다.
하나의 독립적이고 존엄한 인간이 타인의 눈총과 질타를 받아야 하고, 그걸 사회는 암묵적으로 용인했다. 정작 법이 제제를 가할 수 있는 수단 미미하다고 봐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는 지독하게 남들의 시선과 잣대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둘 사이의 문제가 만천하에 드러나 그야말로 구제할 수 없는 더러운 말종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도 예수가 되어야 했다. 자신을 죽음으로 내던지든가, 역설적 논리로 맞서든가 해야 하는 것인데, 혜연이나 나나, 그 둘 중 어느 하나에도 재주가 없는 얼금뱅이들이었다.
"더 있으면 내가 못 갈 거 같았어."
"난 당신을 잡으려고 했어, 지금도 그렇고..."
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고, 고개 숙여 내 손등 위에 이마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들여 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을 때 그녀의 눈 속에는 그렁그렁한 눈물이 한가득 고여 있었다. 툭, 하고 눈물이 두덩의 둑을 넘어서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져 툭 하고 소리를 냈다. 나 역시 그녀의 감정에 따라가면 걷잡을 수 없는 울음으로 변할 것만 갔았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혜연과 나 사이에 희뿌연 장막이 들어서는 것 같았다. 생머리의 여자가 뿜어낸 담배연기가 천천히 허공 중에 퍼져 길게 한 줄을 만들었다. 실내엔 전혀 공기의 움직임이 없어 보였다. 담배연기가 그대로 멈춰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시야를 흐렸다.
"희경언니, 여기 팬을 꺼놨나 봐. 사장님한테 팬을 좀 켜달라고 해줘."
생머리 여자의 이름은 희경이었다. 놀란 듯 담배를 끈 희경이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고, 혜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 많이 아플 거야. 당신 이란 사람, 날 많이 아프게 해."
내 손등 위에 올려놓은 그녀의 손을 돌려 잡고 다시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덮었다. 입술을 가져가 그녀의 손가락들 사이에 닿게 했다. 차가운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당신 상황이 변했어, 불가피해. 당신 가정이 그대로였다면 우리 관계도 그대로 일거야. 당신 삶을 살아야지, 이렇게 내 삶을 당신에게 걸쳐놓을 순 없지."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나는 나만을 생각했고, 이기적 선택에 익숙했다. 내 상황이 달라진 것에 따라, 나는 혜연과 같은 유부녀가 아니라, 싱글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내 옆에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고, 동시에 그녀에게 미안했다.
"미안해, 내 생각만 했어. 이제 당신을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
"바보, 당신처럼 나도 떳떳할 거 같을 거라 생각했어?"
이제 확연해졌다. 가야만 하는 그녀를 보내야 한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정말 이게 마지막이야?"
"그래야지."
"하룻밤도 같이 있으면 안 돼?"
나는 벌써 두 번, '모텔 가자'는 말을 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정혜에게 했고, 지금 혜연에게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혜연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루만이라도 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희경이 자리로 돌아왔고, 방안에 낮게 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침묵이 흘렀다. 방문이 다시 열리며 주인여자가 커피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희경이 혜연의 옆으로 자리를 당겨 앉자 주인은 각자의 테이블 앞에 빈컵을 하나씩 돌려놓고, 컵 위에 사기로 된 드립퍼를 올렸다. 드립퍼 안에 융드립을 넣고 그 속에 커피를 세 스푼 떠 넣었다. 그리고 주둥이가 빨대처럼 가느다란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커피가루 위에 조금 둘러 주었다.
"에스프레소보다 굵게 분쇄를 해야 해요. 그리고 이 융드립을 사용하면 훨씬 부드럽고 강한 맛을 느낄 수 있죠. 거름지가 정수기 필터처럼 성분들을 다 걸러버리거든요. 그래서 무미건조한 맛이 되죠. 일반 커피숍들이 차별성 없는 맛을 내는 이유가, 그래서 그런 거예요. 융드립은 커피빈의 고유한 맛을 통과시켜 주거든요. 그래서 바디감이 살아 풍미를 더해준답니다."
방안에 커피 향이 퍼졌다. 구수한 향이 방안을 돌자 침묵은 더 가라앉았고,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두운 그림 속에 앉아 있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비현실적인 관계들로 얽힌 사람들이 한 장면에 동시에 등장한 그림, 그 그림 속에 나도 한 개의 공간을 차지했고, 이제 이 그림도 저쪽으로 흘려보내야 할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사장이 뜨거운 물을 흩뿌린 커피 알갱이들을 내려다봤다.
"미정씨 이제 우리가 할게요. 나머진 우리도 할 줄 알잖아."
희경은 주전자를 잡아 올리는 사장의 손위에 그녀의 손을 올렸다.
"아, 죄송해요. 제가 분위기 파악이 안 돼서, 이만..."
사장은 황급히 주전자를 내려놓고 내 얼굴을 힐 끗 쳐다보고, 희경을 다시 쳐다보곤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
희경이 혜연에게 물었다.
"내가 없는 게 좋겠어?"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연에게 다시 희경이 물었고, 고개를 든 혜연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프린스에 같이 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