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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꿈꾸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기록

by 별사탕

김시습, 돌베개. 박희병 정길수 역

김시습, 돌베개. 박희병 정길수 역

금오신화를 띄엄띄엄 읽다가 이렇게 몰아서 다 읽어보긴 처음이다. 한 편씩 읽을 때나 내용상 크게 다른 건 없지만, 이 책이 그간의 오역을 바로 잡았다는 의의를 가지고 읽어 볼만할까 싶어 읽었다.

발간 취지에서 부터 기존의 번역서들이 오역이 많아 바르게 잡았다고 했고, 그걸 바탕으로 해야만이 다음 단계의 작업(번역이든, 창작이든)이 가능하다는 데 동감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이라는 불가항력적 국가 불능의 상태에 대해 전생애를 걸고 반항한 삶을 산 유학정신의 고갱이 같은인물이다. 꺾이지 않는 절개를 지닌 선비정신이라 해두자.


그 정신은 당연히 그가 남긴 글에 새겨져 있다.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이 이야기들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금오신화는, 지금 나와 같은 무지한 일반 독자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겁고 깊은 지적 체계 위에 씌어진 글들이다. 이는 서양인들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로 이어지는 철학적 전통에 빗대어 자신의 사상적 흐름을 말하는 것과 같다. 소위 말해 우리의 지적 전통은 일제에 의해 죄다 끊어져 나가 단절의 절벽을 만났으니, 이광수는 고아론으로 임화같은 사람은 이식문화론으로 절망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 모습에서 문화적 전통의 깊이를 찾아볼 수 없고, 지적 전통의 체계를 찾아 볼 수 없는 현실은 모두 그런 이유에서다.

현대 들어 이런 현상이 심화된 것은 고전을 전공한 학자들이나,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도서관에 잠자고 있는 숱한 고전들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죄다 번역해야 한다. 삼중당문고 같은 저렴한 국민 고전 전집을 출간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 그간의 오역을 바로잡는 바른 번역을 해나가며 끊어졌던 실이 가느다랗게나마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박희병 정길수교수의 번역서는 길잡이가 된다. 이들이 표방하는 발간 취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돌베개에서 나온 '천년의 우리 소설' 시리즈가 우리 고전을 다시 보자는 취지는,


중고등학생들이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고 시대감각에도 맞지않는 고전소설을 읽겠는가?


하는 반성에서 나온 현실감있는 목소리를 보여준다.

그 후-읽고 나서-의 문제는, 더 크다. 여기에 해석의 문제가 들어온다.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선,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을 보자.


박희병은 소설의 이야기가 작가 김시습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의아스럽다. 왜냐하면, 보통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를 정면으로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이유는 김시습의 다른 저서를 통해 그의 사상을 꿰뚫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용궁부연록에 등장하는 한생이라는 선비가 용왕과 대화하는 장면에거 불교에서 행하는 각종 의식의 허위성을 언급하며 그 허위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를 용왕의 입을 빌어 확정짓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김시습의 유학 편향적 사고, 다르게 말하면 유학을 제외한 다른 세계관에 대한 부정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해 왔었는데, 박희병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이야기적 선택 장치라고 말하고 있다.


박희병의 주장에 다소 무리가 있으면서도 호소력 또한 강한 이유는(김시습이 어렸을 떄 세종이 불러 강연회에 다녀와 고무된 역사적 장면을 들어 그 아름다운 세종과의 일화를 잊지 못한 김시습이 작가로서 용왕을 만들어냈다고 한 일련의 주장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 김시습은 여타의 종교와 조화를 이루는 생각 쪽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들어 도교 불교를 보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사상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딱 여기까지만 말하고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 무릇 작가라함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문학적 장치를 전기에 빗대어 해석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충분히 논란의 거리가 될만한 언급을 하고 있어, 새롭다.


유학이라는 학문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 없는(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학문이다. 이기일원 이기이원 하는 기의 사단과 칠정론이 분분했던 것도 몸을 바탕으로 두고 펼쳐진 논쟁인 것을 보면 유학만큼 철저하게 찐-물질주의자의 학문이 다시 없다. 이런 유학이 당면한 문제는, 귀신의 문제였다.


양생이 죽은 여자를 만나고, 이생이 최씨녀를 만나 삼생의 연을 맺고, 홍생이 항아의 시녀를 만나고,박생이 염마를 만나며, 한생이 용왕을 만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유학이 거론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이야기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문학의 영역이 된다.


현실적인 학문과 비현실적인 귀신의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곳, 이야기의 세계다. 동서고금을 통 털어 작가로 하여금 이런 비현실적인 세계를 언급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는, 현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김시습에게는 세조의 왕위 찬탈이었다. 현실의 고뇌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저 세상(저승)에서 말하는 질서였던 것, 그 질서가 간절하게도 이세상(이승)에 간섭해 주기를 바라는 마지막 지푸라기 같은 도구였던 것이다.

이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비롯한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작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승이란 공간은 저승의 세계와 이어져 있으므로 이 둘 사이는 불가분이라는 현실적 요청이 그러한 비현실적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이는 지리멸렬한 세상에 대한 반성이자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구, 염원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


꿈꿀수록, 현실은 손끝에 잡히지 않아서 더욱 아득해 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귀신이 난무할수록 현실은 이미 판타지라는 얘기다. 오늘 우리들의 시대가 꿈꾸는 시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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