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먼 곳
나이가 들면서, 왕성했던 혈기가 누그러짐과 동시에 화도 쌓여간다. 젊은 시절 분출했던 기운들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소위 말하는 분노게이지의 상승이 심혈관계 질환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 제1번은 관계를 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겠는가.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평생 그렇게 하면서 살았다. 꼭 화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관계는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끊어진다. 그것이 이치에 맞다. 그래서 불만도 없고 누굴 원망하지도 않는다. 자의 혹은 고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방관적 태도로 일관한 자연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걸 '무위자연'이라고 일단은 포장하자.
모든 관계의 근원이자 최후는 가족이다. 절친이라는 말을 뒤집으면 친절이 되어야 할텐데, 친근을 뒤집으면 근친이 되는 말장난처럼, 가족은 거리가 없는 친근을 내세워 근친이라는 비도덕을 만들어낸다. 그 어떤 관계보다도 ‘가깝고도 먼’ 가족, 그래서 해탈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 그 멀고도 험한, 가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해 노래한 시 한 편이 있다. 영화에 시를 읊는 장면이 나온다. 이 시 한편 때문에 시집까지 사 보게 되었다.(시집을 돈 주고 사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감독과 시인이 친구라는데, 시인의 시가 발단이 되어 만든 영화가 시의 제목이기도 한 '정말 먼 곳' 이라는 독립영화다.
영화는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다. 우리 사회가 허용할 수 없는 사랑의 허용치를 다룬 영화다. 이 시가 언급하는 '정말 먼 곳'은 어느 특정 상황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꿈꾸는 그 '먼 곳'은, 사실 내가 도달 할 수 없을 만치 '먼 곳'이어서 꿈과 같은 바람, 환상과 같은 현실 속의 '먼 곳'이다. 그 '먼 곳'을 위해, 지금 있는 이 자리를 놓아버릴 수 없는 현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녹아내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는 지금 이 곳의 쓸쓸하고 안타까움을 노래한다는 데 있다.
그들을 포함해서 모든 관계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담고 있는 시다. 그런 점에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 고통의 현실을 똑바로 마주본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아간다.
정말 먼 곳
박은지
멀다를 비싸다로 이해하곤 했다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먼 곳으로 떠나기도 했지만
정말 먼 곳은 상상도 어려웠다
그 절벽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몰라 빨리 가봐야 해
정말 먼 곳은 매일 허물어지고 있었다
돌이 떨어지고 흙이 바스러지고
뿌리는 튀어나오고 견디지 못한 풀들은
툭 툭 바다로 떨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 소리는
파도에 파묻혀 들리지 않을 거야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면 불안해졌다
우리가 상상을 잘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상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 수 없었고
거짓에 가까워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먼 곳을 상상하는 사이 정말 가까운 곳은
매일 넘어지고 있었다 정말 가까운 곳은
상상을 벗어났다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고 흙을 잃었으며 뿌리를 의심했다
견디는 일은 떨어지는 일이었다
떨어지는 소리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정말 먼 곳을 상상하며 정말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그래야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박은지, '여름 상설 공연'(민음의 시 288)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