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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논쟁사

도산 안창호의 망명 자금(1952)

by 별사탕
한국논쟁사2.jpg 청람문화사, 손세일 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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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3월 동아일보에 황의돈(1887-1964, 단국대·동국대 사학과 교수)이 연재하고 있었던 '爲國抗日義士列傳'의 내용 중, '손병희전' 속에 도산이 조선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증미황조, 曾彌荒助)를 속여 거금 30만 원을 받아 망명 자금에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썼다. 이 기사에 대하여 주요한(1900-1979, 시인·언론인)이 같은 신문에 '안도산 등의 망명자금 출처-황의돈 씨의 소설에 대한 이설'을 기고하여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했다. 이에 다시 황의돈이 '신태양'에 '역사와 僞史'라는 글을 써서 재반박하였다.

<위국항일의사열전>(동아일보, 1956년 5월 31일-6월 2일)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일진회와 이완용 내각 등이 주장하는 한일합방 주장에 대하여 조선 내 감정이 격해지면서 반일감정이 고조되자, 온건하게 조선의 백성들의 동의를 얻는 방법을 고심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당시 일진회에 반대하고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안창호를 용산 헌병대의 구금에서 석방하였다. 아라스케의 공작은 다음과 같았다.

아라스케 통감은 조선을 합방하여 완전히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현 이완용내각을 해산시키고, 조선 민중들 지지의 중심에 있던 청년당을 조각하여 신내각을 출범시키고자 했다. 박영효를 총리대신, 안창호를 내부대신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안창호 측과 교섭한 결과, 일은 잘 진행되는듯했다. 이에 안창호 측은 진보당을 창당하는데 드는 비용 30만 원의 요구하였다. 돈을 받은 핵심인물 네댓 명은 양화진에서 중국배를 타고 청도로 망명해 버렸다. 이때가 융희 3년(1909년) 12월 말경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주요한은 한 달 후에 같은 신문에 반박 기사를 냈다. 주요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안도산 등의 망명 자금 출처>(동아일보, 1956년 7월 1일-4일)

도산의 항일운동의 협력자였던 김지간의 증언을 바탕으로 반박한다. 그의 증언은 이러하다. 항일운동으로 용산 헌병대, 개성 헌병대, 경무총감부에 구속되어 있던 일행들이 1909년 12월 모두 석방되었다. 이듬해 1월 이들 6인이 모여 회담할 때 통감 아라스케에 의해 제안된 청년내각 조직의 의제를 꺼냈으나 도산이 일본인의 위계에 빠질 우려가 있음을 들어 반대하였고 일동은 도산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이어서 통감의 요청을 거부할 시 반드시 그 보복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해외 망명하자는 의견이 나와, 이종호의 주부 이용익의 상해와 해참위(블라디보스토크) 은행의 자금을 편취할 수 있으니 가기만 하면 생활은 문제없을 것이라는 제안에, 일행 중 이갑의 주머니 돈을 털어 망명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황의돈의 ‘안창호, 통감 30만 원 사기설’에 대해, 주요한은 ‘김지간의 증언설’을 근거로 반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시 황의돈은 신태양 9월호에 긴 장문의 반박문을 기고했다. 반박문은 상세하고 집요하다. 주요한의 반박을 조목조목 인용하여 부정한다.


1. 동아일보가 자신의 반박 기사를 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언급

-동아일보 편집장과 사장에게 호소하였으나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신문사의 반응과 무응답으로 일관하여 그에 대한 대응으로 ‘위국항일의사열전’ 연재를 끊음.


2. ‘일한합방비사’에 근거한 정세 분석

-1930년에 나온 흑룡회의 라는 책을 근간으로 한일합방 근간에 일어난 조선의 정치세력에 대한 해설을 전제한다. 일진회, 서북학회, 대한협회 3파의 활동에 대해 개관하며, 이 3파가 어떻게 손을 잡게 되는지 그 과정을 약술한다. 이완용 내각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면서, 각 단체의 정치적 목적이 강했다. 일진회는 친일을 표면화한 단체로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기는 소원한 상태여서, 패기 넘치는 젊은 당원들로 구성된 서북학회, 전통적 민족주의자들이 모인 대한협회의 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이 초점을 맞춘 포인트가 바로 이완용 반대였던 것이다.


3. 지인 노기숭의 전언

서북학회 회원 노기숭은 정당과 내각 조직을 위해 일본인으로부터 30만 원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고, 안창호의 비밀결사 신민회의 간부 安奭과의 대화 중 일본인으로부터 30만 원을 받아 망명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다.


4. 30만 원 사용처

속편 도산 안창호(박현환, 삼협문화사, 1954)를 보면 안창호 일행은 미군의 땅을 구입하여 사관학교를 건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쓰고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3천 불이 30만 원이라고 추정한다.


5. 여러 지역의 군수를 지낸 임병억의 증언

연수차 히로시마시에 갔을 때, 시 관계자와의 대담 중, ‘안창호가 통감부 돈 30만 원을 먹고 망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6. 반박 1 : 이종호의 조부 이용익의 외국은행 자금을 생활비로 쓰자고 한 증언

미군 땅 구입자금 3천 불의 출처가 이용익의 자금 언급이 되어야 하는데 언급되지 않았고, 이용익이라는 사람 자체가 돈 쓰기를 좋아해서 해외은행에 이미 돈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7. 반박 2 : 김지건의 증언

김지건이 말하는 1월의 ‘원동(서북학회의 회장 이갑의 집) 6인 회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모순을 지적한다. 즉, 3인은 옥중에, 1인은 병중에 있었던 사실, 그리고 중언 당사자인 김지건은 아직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동경에 있어야 할 김지건이 어떻게 한국에 있어야 하는지 시간적으로 모순된 증언이라고 말한다. 더구나 농과학생이 안창호와 같은 사람과 정치적 망명을 할 이유가 하등에 없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도산 안창호’(안창호기념사업회, 1947)에도 도산의 망명계획에 같이 한 10인이 거론되는데 여기에도 김지건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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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 코민테른의 이름으로 200만 루블을 제공하고자 했던 '고려공산당 정치자금 게이트'가 1920년대 초반에 있었다. 관련한 인물들은 지금도 돈의 유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유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돈 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사람의 인격도 국가의 중차대한 문제도 일시에 무화시키는 마력을 가진다. 다행히 도산의 경우는 그 인품이나 정치적 노선에 위해를 가하지 못했으니 그만한 정도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도산의 망명자금 운운 역시 도산의 결벽적 성격상 있을 수없는 일이라는 점도 일리가 있다. 이 문제를 밝힐 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 국회에서 거론된 통감 30만원 사기설에 대한 기록을 찾아낸다면 자명할 일이나, 아직까지 그 기록을 찾았다는 말이 없는 걸 보면, 낭설인 쪽에 더 가깝다고 보인다.


고인의 행적은 후세인들의 말에 의해 왜곡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전혀 있지 않은 사실 무근의 일을 꾸민 것이라면, 저의가 어디에 있든,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우리는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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