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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위에서

중심이 된 경계선

by 별사탕
틸리히1.jpg 2017, 김흥규 역, 동연


폴 틸리히는188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28세인 1914년, 1차대전에 야전군목으로 참전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교수직을 정직, 해임당하면서 비유대인으로서 최초로 해직교수가 되었다.


1936년(50세) 출간한 '경계선 위에서'(2017, 김흥규 역, 동연)는 철학, 신학, 종교학을 아우르는 그의 삶을 지배한 사상의 이력을 밝힌 책이다.


신학이나 종교 이런 분야의 어젠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배우는 자세로 읽었을 뿐이다. 특히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는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 만들어낸 '절대자를 향한 절대적 의지의 소산물'이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지 않았고, 모른다고 해서 종교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서양사의 몸통 전체를 관통해 온 철학적 기반이 기독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보잘것없는 내가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으니, 내 분수는 아는 셈이다. 간단히 말해, '잘 모르지만 존중하는 마음은 버리지 않고 있다.'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 책의 재목에 등장하는 '경계'라는 단어는 대단히 큰의미로 되새김질 할 수 있는 단어이다. 글을 읽어 나가면서 '경계'의 의미가 신학과 사회, 종교와 신학, 종교와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주변인으로서의 틸리히가 아니라, 그 경계의 중심에 섰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는 데 뜻이 깊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 있었던 '경계'는 조금씩 세계의 중심으로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런 사정 속에 이 책은 사회와 정치, 이념과 세계 등의 교차점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석학으로서의 '틸리히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간단히 말할 수 없고, 정리할 수 없는 모호함과 불확실함으로 뒤섞여 있다. 석학이라 함은, 그렇게 엉킨 실타래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의 글을 읽으며 하게 된다. 그만큼 명쾌하고 정확하다. 그래서 이 짧은 분량의 책은 그가 어떻게 석학인지 알게 해주는 책일 수 있다.


특히 '교회와 사회 사이'(p.86) 챕터를 보면, 호교론에 대해 말하는데, 자신의 것(기독교)을 이단의 교리로부터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의 고민을 잘 정리하고 있다.


고대의 호교론이 다신론의 인본주의에 맞서 싸운 것이라면, 현대의 호교론은 기독교 인본주의와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기독교는 신본을 근간으로 형성된 종교(어느 종교는 그렇지 않겠는가)라 인본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인데, 1차 대전후 기독교 내에 인본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을 말한다. 당시로 보면 교회 안에서 배척되는(용납할 수 없는) 이단(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인 셈이었다.


틸리히 본인 또한 기독교 인본주의의 본질과 현실을 깨닫고 노동운동(탈기독교적 대중운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계급투쟁에 뛰어들어 기독교를 변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종교사회주의에 몰입하게 된다. 이는 노동계급 대중 속으로 들어가 '내부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1950년대 해방신학자들의 논리와는 다르다) 기독교가 종교사회주의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호교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 노동, 운동의 개념은 기독교 안에서 이해, 포용, 활동 가능한 종교의 영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호교론 자체가 내부적 이론 투쟁과 같은 것이 아니라, 상대(이단)의 논법에 맞서 기독교를 지켜내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인본주의의 적이 전통적 기독교 그 차체라는 점에서 기존의 호교론과는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본주의, 현세적 사회가치의 수용 등은 전통적 기독교적 가치와는 다른 쪽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내부적 갈등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대편에 있던 사회주의자들조차 스스로 가장 경계하는 집단이 종교 사회주의자들이라는 것에 아이러니가 있다.


그래서 종교적 사회주의는 노동운동에 함축된 기독교 인본주의가 기존의 사회적 인본주의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 주어야 했고, 그래서 비기독교적 사회봉사영역을 수용한다.


틸리히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누었던 기존의 교회 개념 중, 보이는 교회를 다시 '명시적 교회'와 '잠재적 교회'로 나누었다. 특히 잠재적 교회는 교회 밖에 존재하는 기독교적 인본주의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틸리히에게 중요한 개념이었다. 즉,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들이 가진 인본주의적 삶이 '이들도 인간 실존의 유한성을 체험하고, 영원하고 무조건적인 것을 추구하고, 정의와 사랑을 위해 절대적으로 헌신하며, 어떠한 유토피아도 넘어서는 희망을 간직하고, 교회와 국가를 해석할 때 기독교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로 가득 찬 삶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잠재적 교회의 세계이다.


틸리히는 역설한다. 교회 밖에 존재하는 이 교회가 어쩌면 조직화된 교단에 속한 교회보다 더 참다운 교회일 수 있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명시적 교회(물리적 실체를 가진 교단, 조직화된 교회)가 조직화된 무기를 휘두를 때 교회와 사회 간의 간격을 심화 시키는 위협이 된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잠복교회는 기독교인이 운명적으로 서 있어야 할 경계선 중 하나라고 90년전의 틸리히가 지금의 우리에게 잔잔한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다.



목사와 교사


마이크를 잡고 외치는 목사의 목소리가 과연 '잠재적 교회'의 목소리인가, 틸리히에 의하면 전혀 아니다. 세력과 권력을 가진 조직화된 교회, 즉 '보이는 교회'다.


틸리히는 경고한다. 그들이 '조직화된 무기를 휘두를 때 교회와 사회 간의 간격을 심화 시키는 위협'이 된다고! 90년전의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미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보이는 교회'와 결별했다.


거기에 역사 교사가 끼어들었다. 아무리 봐도 목사나, 교사나 거기에 있을 자리는 아닌 것 같다. 현대 한국의 민간 설화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목사와 교사의 자식들은 모 아니면 도가 된다는, 그 이야기가 제발 본인에게 해당하는 전설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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