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의 그림자
감독 : 미첼 프라치도
출연 : 리카르도 스카마르시오, 루이 가렐, 이자벨 위페르, 미첼 프라치도
상영시간 : 120분
관람등급 : 청소년 불가
카라바조 영혼과 피
감독 : 헤수스 가르세스 람베르트
각본 : 라우라 알리에비
출연 : 에마누엘레 마릴리아노, 사라 팔리니
상영시간 : 94분 59초
관람등급 : 전체관람가
본명이 미켈란젤로 메리시(그의 이름 뒤에 붙은 ‘다 카라바조(da Caravaggio)’는 from Caravaggio란 뜻으로 ‘카라바조에서 온’이란 뜻이다. 동양 문화로 치면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이 싸움에 나가 이렇게 외치는 것과 같다. ‘나는 상산의 조자룡이다.’)인 이 사람은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가 오늘날 기려지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미스테리한 죽음과 체제를 뒤흔든 그림.
최근 개봉한 카바라조 영화가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카라바조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드라마이고, 하나는 ‘카라바조-영혼과 피’라는 다큐다. 이 둘은 장르는 다르지만 바라보는 지향점은 같다. 두 영화가 교차하는 지점에 바로 카라바조의 죽음과 그림이 있다.
먼저 드라마, 로마교황청의 교리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는 교회의 애물단지다. 테니스 경기중 격분을 못 참은 카라바조가 상대 귀족을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그 집안의 친인척들이 그에게 사형을 가하기 위해 그의 뒤를 쫒는다. 결국 카라바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자신을 후원하는 후작의 집에 의탁하여 숨었다. 이런 사생활의 전면에는 이미 그가 그린 그림으로 인해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 논란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겉과 속, 두 가지 모두에서 카라바조는 이미 교황청의 눈 밖에 날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죽음, 서사의 종말
그래서 교황의 기사(그림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가 카라바조의 행적을 쫓는 형식을 띤 영화, 소설로 치면 주인공의 행적을 쫓으며 주인공의 삶을 요약 정리하는 이야기, 후일담 소설이 된다. 그림자의 계략에 빠져 죽임을 당하는 카라바조의 모습으로 드라마는 대미를 장식한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결말처리.
그러나, 다큐에서는 그가 열병을 앓다 죽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그의 생을 정리한다. 그의 사인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여운을 남겨 놓는 결말을 짓는다.
두 영화를 한꺼번에 보면, 이렇게 다큐와 드라마가 뒤섞이며 현실과 가상이 뒤섞이는 묘한 신비로움을 체험하게 된다. 이런 체험은 관객이 무엇이 사실인지 알지 못하게 만든다.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거나, 그럼에도 분명하고 명확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카라바조가 그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 그림이 웅변하고 있는 것, 그것이 카라바조의 죽음에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다.
그림, 전복의 시작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의 형상의 가장 순결하고 고귀한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카라바조가 그린 성모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도 없고, 광배도 없는, 단지 생명을 다한 육신의 모습일 뿐이다. 사람들 속에 죽어 누워 있는 육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뜻이 담겨 있다. 더구나, 교황청에서 주목한 카라바조의 발칙함은 이 성모는 강에 빠져 죽은 시신을 끌어와 테이블위에 눕혀놓은 시신을 모텔로 했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죄다 이런 식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거리의 창녀, 거지, 부랑자 등 당시의 하층민들을 데려다 모델로 쓴 것이었다. 카라바조가 그린 성화들에 사용된 모델들이 죄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거나, 체제전복적인 혁명적 사상가이거나 둘 중 하나란 뜻이다. 38세에 어떤 알지 못 할 이유로 유명을 달리했으니, 형경가는 될 수 없었다. 다만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사상이 담긴 빛과 어둠의 바로크 미술의 시대를 여는 새로운 시대의 창시자는 되고도 남았던 것이다. 예술가의 삶, 그것은 그어서 한 번에 확하고 불타오르는 성냥불과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짧은 시간동안 주변을 환히 밝혀놓고 그 불과 함께 사진도 어둠 속에 묻혀버리는 존재, 우린 그런 사람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불꽃의 예술가 카라바조.
그의 삶에 이미 그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말하면 꿰맞추기식 억지일까. 뒤집어 말하면, 그의 죽음 속에서 그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납득 가능하다. 그의 삶 자체가 죽음을 위한 도정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강력한 정신의 소유자, 카라바조는 현실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자신 스스로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알게 되면, 그의 죽음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할만한 이유가 만들어진 셈이 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카라바조의 잔혹한 그림들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각인된다. 당시 화가들의 화실에는 살아 있는 말을 데려와 모델로 쓸 정도로 실물을 사용했다는 점,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화가의 머릿속 상상의 결과물이 그의 그림이 아니란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이 모든 작업 조건들은 그림을 사실보다 더 사실로 그리고 싶었던 당대 화가들의 고민이 담겨있다는 점(실제로 카라바조는 오늘날 카메라의 원리인 핀홀을 만들어 그 구멍을 통과한 빛이 캔버스 위에 만들어 놓은 상을 보고 밑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은 사실의 너머에 있는 것, 진리에 가까이 가고자 한 화가들의 열망을 짐작게 한다.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 보도 사진 기자들이 현실을 수 없이 찍어대지만 그 중 몇장만이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되는 것과 맥락이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과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을 카라바조의 삶을 통해서도 증명된다고 말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