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초혼

혼을 부르는 소리

by 별사탕



감독 각본 조정래

각색 황서미

제작 임성철

주연 김정연, 윤동원, 박철민

촬영 최용진, 이영진

음악 배상재(하이브로)

음악배급 이지호(제이앤엠엔터테인먼트)

주제곡 들꽃처럼, 꿈꾸는 고래

개봉일 2025년 3월 19일

상영 시간 129분

상영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조정래에 주목해 보자.


그는 귀향(2017.9), 광대(2020.7), 초혼(2025.3)을 감독했다.

위안부 소녀들의 이야기, 장님이 된 청이의 이야기, 공장노동자들의 파업이야기.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부정한 권력에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며 고초를 겪는 민초, 민중들이다. 이처럼 그가 만들어내는 영화들은 몇 가지 공통된 요소들이 눈에 뜨인다는 점에서 조정래의 영화를 주목해 볼 만하다.


위로하는 소리

어린 위안부들이 피폐하고 수치스러운 죽음과도 같은 삶을 스스로 위로하며 이겨내려는 소리, 아리랑을 부르는 ‘귀향’. 아예 심청가의 대목들이 스토리를 이루어 심청과 심학규의 한이 서술되는 판소리 음악극 ‘광대:소리꾼’. 90년대 대학가의 소리패를 중심으로 불렸던 각종 민중가요가 맥을 이루는 ‘초혼’까지, 조정래의 영화에서 소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소리(노래)는 스토리 전개를 일시적으로 멈추게 만든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하여 관객에서 하소연한다는 점에서 정서적 몰입이라는 극적 긴장-이완의 효과를 준다.

즉, 조정래의 영화들은 소리를 통해 정서를 극대화, 초점화 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다시 말해, 그가 만든 모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리들은 극을 진행시키는 서사의 일부가 아니라 등장인물들 스스로가 자신을 위로하고, 그 위로의 장면에 관객을 불러들여 거기에 동참시켜, 한 데 어르고 달래는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화된 장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조정래의 영화는 특별하다는 뜻이다.


부당함에 맞서는 소리

또한, 그의 영화들은 선과 악이 분명한 등장인물들의 대립을 보여주는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제와 식민지 백성, 부정한 권력자와 무고한 민초, 자본가와 노동자. 거기에는 식민지가 있었고, 부패한 권력이 있었고, 부당 불법한 횡포가 있었다. 그들에게 억압당하는 자들의 가슴 속에 깊게 뿌리 박혀 있는 것, 그것은 녹아내리지 않는 억울함과 통한의 절규로 남아 있는 불덩어리같은 것이다.

지금도 현재화되어 있는 구조적 모순, 개인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권력 앞에 선 미약한 존재들, 끝내 벼랑끝에 내몰린 자들의 아우성은 소리가 되어 이 강산에 울려퍼진다. 그래서, 그들의 아우성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는 그들의 가슴을 해원하는 소리로 들리기도 한다. 저항이 가닿는 끝자락에 해원의 노스탈지아, 깃발이 펄럭이는 것.


대동굿의 소리

마침내, 그 소리는 함성이 되어 돌아온다. 초혼에서 들려주는 절창은 소리가 아니라, 영화다, 이미지다. 그래서 조정래의 영화는 음악극이 아니라 영화일 수 밖에 없다. 주인공 민영의 노래 끝에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의 머리 위로 휘날리는 깃발들의 나부낌, 그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하나로 어우러지는 장면은 조정래 특유의 화해법이다. 우리는 모두 같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자리에서 싸울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 깃발 아래 함께 나부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조정래식의 유토피아로 제시한다.

라 마르세예즈, 삼색기가 휘날리고 불타버린 잔해의 폐허 속에서 우뚝 서서 하나 되는 혁명의 상징, 그런 판타지적 이미지가 우리들에게는 '그날이 오면, 오월의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국가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넘실댄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다, 가슴 속 외침의 함성이 조정래가 응어리로 품었던 가슴 속엣말의 외침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속도가 느리다. 천천히, 갈등도 천천히, 대사도 천천히, 모든 사건의 전개가 느리다. 그것이 극의 전개를 어설프게 한다고 인식할 수도 있을 것이고, 힘빠지게 하는 답답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건의 전개 속도가 극적 긴장을 느긋하게 만들어 스토리의 기승전결 대립각을 무디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있다.

하지만, 과거를 현재화시킨 솜씨나 원작을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시킨 솜씨나, 절창 위에 절경의 그림을 올려 그린 솜씨나 그가 보여준 영화적 연출의 바탕에 깔려 있는 화해와 조화, 위로의 정신기조는 어느 것 하나 사랑이 없이는 이야기할 수도 담을 수도 없는 그만의 너른 그릇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의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개봉관을 배정해 주지 않아 떠돌고 있는 영화다. 조정래가,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불러온 것처럼, 우리가 그를 불러와야 한다. 초혼이 그런 뜻이라면 말이다.


keyword
토, 일 연재
이전 04화행복의 노란 손수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