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으로 돌아가는 사랑
루카 구아다니노의 욕망 3부작(챌린저스,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중 하나다.
이 영화는 2009년 9월 5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초 개봉된 후 지금까지도 재개봉되고 있는 띵작이다. 49세의 아름다운 틸다 스윈튼을 대형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녀의 의상과 몸가짐, 표정이 총체적으로 연출하는 고상함은 그녀가 얼마나 변신에 귀재인지 알게 해준다. 그것이 이 영화를 지배하는 'LOVE'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밀라노 방직 재벌가의 며느리 엠마가 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와 불륜의 관계에 빠지면서, 그 아들 에도가 엠마와 갈등중에 실족으로 인해 죽게되면서, 결국 엠마가 이 밀라노 가문으로 부터 벗어나 안토니오가 있는 산레모로 떠나간다는 이야기.
아들의 친구와 불륜에 빠진다는, 막장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시사하는 바는 스토리처럼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엠마의 사랑은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조르다노의 오페라 '안드레아 셰니에'의 장면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 속에 등장하는 'la mamma morta(엄마는 돌아가시고)'에서 노래하는 '나는 사랑이다'라는 가사가 이 영화의 제목이기 때문이다.
노래는 '나(어머니)는 생명이다, 하늘이다.'로 전개되면서, 이 땅에 천국을 창조하기 위해 내려온 '사랑'이라고 노래한다. 과히 혁명적 사랑이다. 현존하는 이 땅의 모든 질서는 천국에 반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엠마에게 현존하는 유일한 질서는 밀라노 레키가문의 질서다. 이렇게 연결하면 이 영화는 단순한 불륜을 미화한다거나 개인의 일탈만을 그린 부도덕한 이야기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있다.
남편이 붙여준 이름, '엠마'로 살아가는 그녀는 방직재벌 집안의 며느리다. 그녀가 '복무'하고 있는 집안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다. 마치 중세의 귀족가문을 방불케한다. 이 집안에서 엠마는 자신의 본래 이름을 잃고, 자녀에 대한 보살핌 집안의 관리 등에 몰두하며 소위 집안의 남자들을 서포트하는 것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밀라노라는 공간은 엠마의 현실이다. 자신을 잃어버린, '나'를 잃고 살아가는 낙원 상실의 공간, 실락원과 같은 강제된 공간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다. 특히 남편 탄크레디와의 감정교류는 전무하다. 엠마 이전의 '누구'였던 그녀는 완전히 자아를 상실한 존재로 살고 있다.
창업주의 후계자로 지목된 아들 탄크레디는 회사가 글로벌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외국자본에 회사를 매각하려는 작업에 착수한다. 또한명의 후계자로 지목된 손자 에도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쪽으로 회사의 명맥을 이어가고 싶어한다. 이 가문의 현실은 미래에 불투명하다. 그리고 이들의 현재는 미래의 경영자(외국인)에 의해 와해될 가능성이 높다. 엠마의 미래 또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영향을 받을 게 틀림없다. 너무도 명확한 현실에 대비해 미래는 불확실하게 흔들린다.
산레모는 안토니오가 사는 공간이다. 아들의 친구라는 충격적인 장면을 제공하지만, 관계가 주는 윤리와 도덕은 서양인들에겐 금기에서 한 걸음 비켜나 있다. 산레모라는 자연, 사랑, 자아는 안정과 평화를 잉태하는 자궁의 공간이다. 키티쉬라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고, 고향의 음식이자 어머니의 음식이기도 한 '우하'를 안토니오에게 전수하는 땅이기도 하다.
키티쉬에게 음식은 어머니이자 고향이자 영적 교감이다. 이런 교감을 안토니오에게서 느낀다면, 잊었던 사랑을 깨닫지 않을 수 없으리라. 원래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주고 몸의 감각을 살려준 존재 그가 안터니오다.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존재 그런 것이 ‘LOVE’다.
안토니오는 그래서, 불륜의 상대로 선택된 아들의 친구라기 보다, 죽은 아들을 대신할 존재 살아있는 아들의 탄생을 상징한다. 사랑으로 부활한 재림예수와 같은 존재, 어머니가 아들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어머니는 아들을 죽일 수 없다. 에도의 죽음에 대해 엠마가 보여주는 슬픔은, 그래서 절제되어 있다. 그 너머에 살아 있는 아들, 모든 걸 다 주어야만 하는 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아마도 동성관계에 있는 듯하다. 스포츠 경쟁자이면서 사업의 동업자이고, 함께하고 싶어하면서도 떨어져 있어야만하는 관계, 둘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선택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관계를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 둘 사이에 끼어든 존재가 에도의 어머니면서 친구의 어머니인 것. 동시에 존립할 수없는 위험한 관계들인 셈이다.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사랑은 강자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연대라는 의식을 강하게 대변한다. 결국 안토니오와 엠마의 사랑은 약자들의 연대인 셈이다.
화려한 재벌가의 의상을 벗어버리고 허름한 트레이닝 복 한벌로 갈아 입은 키티쉬가 마주한 베티, 마주한 그녀들이 주고 받는 신뢰와 축복의 눈빛, 그것도 역시 ‘LOVE’다. 비밀을 간직한 존재들, 서로의 눈빛으로 모든걸 알아 볼 수있는 두 사람, 그들은 여자다.
베티가 하는 말, 행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항하는 말이다. '그들'은 지배자이며 레키가문의 남자들이다.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행복의 그늘에 존재했던 식물과도 같은 존재들, 그들의 엠마와 베티, '우리'다. 그래서, 이 집안의 수집품은 모란디의 정물화다. 동적 긴장이라곤 일도 없는 정물들은 레키 집안의 초상들과 같다. 죽은 정물과도 같은 삶을 상징하는 정물화를 이 집안에 새로 들어온 여자에게 대물림으로 선물한다. 수집당하고, 물려주는 전통을 여자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혁명이어야만 한다. 근본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 눈을 감고 소리를 낮추고 뒤에서 두런거리는 것이 아니라, 대로를 활보하는 자유에서 찾을 수있는 것, 그것이 엠마에서 키티시로 넘어가는 'LOVE'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