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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실존극장

도널드파머, 정영은역, 필로소픽

by 별사탕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알려진 키르케고르(1813.5.5~1855.11.11 키에르케고르가 어찌하여 표기가 이렇게 됐는지)의 철학적 여정을 개관한 책이다. 만화도 곁들여져 있어 읽기에 좋다.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있던 혜겔 계승자 셸링으로 부터 실존 개념을 전수받았다. 동문수학한 사람들이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하일 바쿠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등 쌩주의자들이었다는 점이 대단히 이채롭다.

키르케고르는 헤겔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변증의 논리를 방법의 영역으로 받아 들인 것이 아니라 사물의 유래와 주체의 존재형태 및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헤겔의 계승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가 결국 가닿고자 했던 곳은 신학적 목표점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이란 것은 데카르트 헤겔류의 논증에서 등장하는 관념적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후 제거했을 때(거부했을 때) 뭔가 무시할 수 없는 주체의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걸 실존이라고 보았다. 이성의 반대편에 있다는 감정과 같은 것들, 생각을 담는 뇌 조직과 같은 것들의 흔적. 그런 것들이 남아 주체(자아)를 형성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자아는 세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의 형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심미적 실존이 천성적 실존이라면, 윤리적 실존은 선택에서 오는 지정 실존이다. 인간은 선택하는 순간 그것만 남고 다른 건 사라지기 떄문이다. 선택을 한 인간에게 비로소 생겨나는 것, 그것이 윤리의식이라는 것이다. 선택적 윤리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후 이것은 무한한 체념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후 생기는 것이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 그래서 종교는 맹목에서 나오는 것이 된다. 이유도 논리도 없는 분야다.

그래서 인간이 실존화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 된다. 죽음 직전에 마주하는 것, 그쯤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은 개별적인간이 겪는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봉변같은 종류다. 그런 인간을 단독자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그건 키르코게르 묘비명이 된다. 죽음 앞에 이게 다 무슨 소용인고? 이 뭐꼬? 하는 불가의 화두와 같은 것이다.


어떤 대상을 선택해서 복무하면, 윤리가 된다. 그 다음 그 대상을 완전히 버리면 종교의 세계가 열린다.


키르케고르의 약혼녀 레기네는 그의 뮤즈였다. 21살 때 14살의 레기네를 가스라이팅해서 3년후 17살에 청혼해서 약혼을 한다. 그러나 키르코게르는 그녀를 버렸다. 실존의 3단계중 윤리적 실존에 접어 들었으나, 그녀를 버리게 됨으로써 그는 신학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33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으며 하루하루를 산다면, 그 집의 하녀가 임신하여 낳은 자식이 일곱번째 자식인 자신이라면, 3등을 하고 오라는 말을 듣고 학교에 간다면, 그 아이의 마음은 어떻게 될 지 짐작조차 할 수 있을까. 가끔 그의 집 식탁에 덴마크왕이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면, 그 또한 어떤 심정이 될까. 지옥과 천당, 냉탕과 온탕, 정신병자와 현실의 권위자 사이를 왔다갔다 한 정신, 그것이 키르케고르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철학이 뭘 하는 것인지 말하라고 한다면, 이런 현실을 꿰뚫고 나가게 만드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19세기의 철학은 거대한 폭풍을 몰아오는 산더미 같은 파도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서야하는 자신을 깨닫게 만드는 것, 딱 거기까지가 철학이 하는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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