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차무진, 소향, 정명섭 마름모
요즘 작가들은 이렇게 책을 만들기도 하는구나 싶다. 장강명이 불륜카페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서 잡담을 하다가, 이걸 소재로 각자 한편씩 써보자는 제의에 출판사 사장이 쌍수들고 환영한 책, 팔리겠다 싶은, 구미 당기게 하는 발상이다. 나도 구미가 당겨 샀으니, 일단 마케팅은 성공.
나는 이런 주제에 남들보다 많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세상이 바뀌려면(소위 사회변혁이라는 측면) 연애방식과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너무도 어리석게, 사람이 바뀌면 사회가, 세상이 바뀌리라 희망했다. 그런데 그건 망상이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키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행태와 믿음, 향수와 추억에 젖어, 그동안 눈에 뜨이지 않았던 세습, 이걸 악의 세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렇게 부르고 싶다, 손오공이 머리털을 뽑아 입김에 날려 만들어내는 분신들, 즉 머리털만큼이나 많은 그의 잔재들은 현실에 부산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럴 줄 정말 몰랐다. 그러니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성분이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 연애방식과 인간애는 개방에서 시작한다. 활짝 열어젖힌 문으로 모든 것이 다 드나들 수있게 되는 것, 그것이 연애고 인간에 대한 예의다.
문장이 의도치 않게 길어진다는 건, 일정 감정이 계속 일어난다는, 이번 경우는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다.
연애는 인간이 하는 행위 중에 남녀 간에 벌어지는 가장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교섭이다. (동물적이라고 하는 것은 식물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접촉이 필요하다는 뜻.) 이 책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연애를 섹스라는 말과 등가로 취급한다. 숭고하고 아름답다고 여길지 모르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이들이 채택한 '금지된 사랑'의 스펙트럼 중 하나가 불륜이고, 금기고 그런 것이다. 물론 그 큰 덩어리의 원류는 '사랑'이 될 것이지만, 그래서 이 금지된 것들을 사랑으로 원점 회귀시키려고 도돌이표를 쓰는 일은 비겁한 짓이다.
그럼 본썰을 풀어 보자.
네 편 중에 가장 수작이다. 소설의 본질은 세속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잘 만들어진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스물 아홉의 직장인 청년이 10년 연상의 직장 상사와 불륜에 빠진 이야기다. 이 청년이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데, 세속의 이면을 들여다보는데 걸리는 시간이 내적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외적 내러티브가 투란도트. 미완성의 투란도트를 자기식으로 해석하면서 진짜 사랑을 찾는 왕자의 하녀를 등장시킨다. 사이코, 소시오 패스인 공주 투란도트에게 진짜 사랑이 무언지를 자기희생적 죽음으로 보여준 하녀를 등장시킨 것, 여기에 빗댄 청년의 사랑 역시 그 이면에 불륜녀의 남편이 보여준, 헌신을 깨닫는다. 불륜의 바닥에는 어느 한쪽의 희생적 헌신이 있다는 사실을 청년은 깨닫는다는 것. 그에 비하면 청년 자신은 그들의 사랑을 완성시켜주는 단지 하나의 소품에 지나지 않을 뿐. 불륜을 사랑으로 향하는 단초, 사랑을 깨닫는 빌미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너무도 범속하다.
은퇴한 영문학 교수 공노식, 그의 유일하게 의미있는 취미는 분리수거장의 전자제품을 들고 와 수리하는 일. 집에는 늘 성경을 필사하는 아내와 자신의 고상하지 못한 취미를 타박하는 딸 은아가 버티고 있다. (은아는 외부에 살고 있지만 틈만 나면 아버지의 고물들을 타박하러 온다.) 그가 주워 온 컴퓨터의 하드 속에서 발견한 폐쇄회로티브에 녹화된 놀라운 장면들을 발견하면서 삶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요약하고 있는 내가 벌써 흥미진진해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요약을 맛갈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소설은 그렇지 않다. 예고편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다.)
장애아와 그의 어머니와의 성관계에서 시작된 장면은 창녀, 할머니, 어린 아이 가릴 것 없이 장애아의 욕구풀이 대상으로 등장한다. 충격적인 금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충격에 꿈쩍할 독자가 아니다. 현실은 더 충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급기야 수녀까지 등장한다. 컴퓨터가 자빠지면서 그동안 사각지대였던 곳이 보인다. 거기에 장애아의 어머니가 상을 놓고 앉아 징을 치고 있고, 상 위에는 사진 쪼가리 같은 것이 놓여 있다. 경비에게 수소문하여 아파트 내 수녀의 존재를 수소문하여 그녀의 방문에 맞춰 수녀를 만난 공노식.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여기서 끝나면 딱 예고편이다. 더 나갔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무속 종교의 판타지물이 되어 버린다. 불륜은 개뿔. 그냥 터부의 섹스물이다. 이런 건 아름답지 않다. 인간을 건드리지 못한다. 설렘이 없다. 자고로 불륜에는 아름다움, 본성, 설렘이 깃들어야 하는 것을!
어쨌든, 여자가 생각하는 불륜은 어떤 것인지 대단히 궁금해진다. 문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줄곧 감성을 자극하는 서술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이처럼 불륜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외국이다. 그렇지 불륜의 공간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한다. 속박으로부터 풀려나야하는 공간이 좋다. 우연히 내 눈에 뜨인 '너', 새롭다, 너에게 하는 말로 내레이션되고 있다. 너는 우연히 내 눈에 띈다. 너는 아내가 집으로 데리고 온 여자다. 단숨에 나는 너에게 끌리고 은근히 나는 너를 요구하게 된다. 나는 이런 마음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나는 변리사이자, 미국변호사 자격을 따기 위해 공부 중이다. 삶의 대로를 걷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버리고 '너'를 선택할 만큼의 마음을 가졌다고 믿는다. 이건 틀림없는 '사랑'이 맞다.
그렇게 둘은 미국에서 관계를 맺고, 이별, 다시 한국에서 재회 한강 뷰의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 둘만의 공간으로 활용한다. 이제 숨겨진 진실, 비밀이 등장할 차례다.
너의 내레이션, 너의 언니를 죽인 은경의 이기심, 너는 가진 자의 교만을 목격했다. 너는 은경을 파괴할 목적으로 나에게 접근하여, 자연스럽게 은경을 파괴할 방식으로 나를 선택했다. 너는 의도를 가지고 내게 접근한 것 뿐이었다. 감춰진 진실이 세련되지 못하다. 이건, 삶의 진실이라는 세속의 지하수에 가 닿지 못한다. 진한 에스프레소의 달달한 설탕 맛에 한 숟갈씩 떠먹다가 설탕이 끝나면서 쓴 원두의 조각이 입자로 혀끝에 까끌거려야 하는데... 그냥 맹물로 마감해버린 맛. 더이상 각성케 할 카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목이 도발적이고 자극적이다. 이런 거 좋아하지. 읽으면서 드는 생각, 웹소설을 보는 듯하다. 배경 없는 밑그림들로만 구성된 서사, 707 출신과 보위부 출신의 탐정 둘이 두 건의 불륜 사건을 다룬다. 불륜으로 얼룩진 살해와 자살사건이 하나. 아내를 니코틴 살해한 남남 커플이 둘. 썩 현실적이 못하다. 개연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개연성은 사실 자체라기 보다 드러내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탐정 두 사람의 조합이 코미디 같기 때문에 정작 사실이 가지는 진실성이 묻히는 것. 그래서 이 두 사건이 실재 있었던 일이라는 데 더 놀라게 되는 것이다. 하나는 침대와 화장실에서 죽었고, 또 하나는 살인을 부인한 거짓말을 한 것, 그래서 그런 도발적인 제목을? 아, 이건 아니다 싶다. 기대감을 무너뜨린다.
실망이 크다. 이들이 애초에 모여서 '금지된 사랑'을 써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는데, 그나마 만족해야겠다. 그날 한 자리에 있었던 정아은의 사고사로 인해, 그녀의 작품은 빠졌고, 나머지 네 명과 편집자는 절망에 빠진 듯 상심이 컸다. 그럼에도 약속을 지킨 것은(그것도 이런 소재로) 이들이 사람을 대하는 신실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은, 도덕군자로서의 글은 쓸 수 있을지언정 파격과 파괴를 뚫고 나오는 새로움은 창출하지는 못 한다. '금지된 사랑'의 본질도 같다. 문학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