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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영화적 표현이란 무엇인가

by 별사탕


감독 : 강미자

출연 : 한예리(영경 역) 김설진(수환 역) 김선재(의사 역) 정명원(수환 친구 역) 김승환(종우 역)

원작 : 권여선

각본 : 이지상 강미자

제작 : 강미자

프로듀서-총괄프로듀서 : 이지상

프로듀서 : 홍인표

촬영 : 이지상 서태범

조명 : 서태범

편집 : 강미자


권여선의 '봄밤'을 영화화했다는데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이 그렇듯 단조로운 스토리 라인에, 감정의 충돌도 없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적 감정들이 폭발 직전인 상태에 있는, 겉보기엔 사건과 갈등요소가 약한 사변소설, 그렇다고 인생의 거대담론에 가 닿았거나 하는 상징과 암시의 요소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무언지 모를 뜬구름같은 감정 하나를 건네받고 그것을 세밀하게 그려내야 하는 과제를 해야 하는 마음처럼 고민스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독 과제를 잘하는 사람이 있긴 하다. 기발한 창의력을 가진, 눈에 띄는 사람이 꼭 나온다. 송곳 같은 재능을 가진, 감출 수 없는 재능의 영역이다.


그래서 봄밤의 주제와 스토리를 새삼 언급하는 과정은 불필요하다. 거두절미하고, 로 시작하는 싯구가 있었던가, 나도 그렇게 시작한다.

사운드

음악을 포함한 사운드는 영화감정을 쥐락펴락할 만한 효과적 장치임에 틀림없다. '봄밤'에는 음악이 없다. 대신 처절한 사운드가 살아 있다. 그것은 제주의 바람이다. 바람에 무작시리 쓰러져 한쪽으로 쓸려넘어가는 풀과 나무들의 이파리와 그것들을 매달고 온몸으로 부대끼고 있는 줄기들의 흔들림은 이 영화의 음악이다. 그 어떤 격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한 피아노 소나타 보다, 격정적인 봄밤을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사건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영경의 기억을 컷으로 표현한 감독의 재능은 선택의 영역이라기보다 과히 타고난 표현의 영역이라고 말할만하다. 스타카토로 화면을 끊어주면서 그 간극을 그대로 암전으로 유지하는 거친 방식의 편집은 영화이기를 포기하는 선택으로까지 보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표현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형식이 내용과 절묘하게 결합하는 표현 수단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이 기억의 스타카토 뒤에는 수환의 기다림, 기다림이라는 추상이 바람이라는 무형의 존재로 표현된다. 기억이라는 추상과 기다림이라는 추상이 만나는 것, 기억의 분절 속으로 파고드는 연속적 바람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단속되는 이 둘의 관계를 아무도 몰르게 은유하고 있다.

무형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들이 무형의 대상들이라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이것은 마치 귀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귀신을 불러 온 것과 같은 말도 안되는 놀라운 방식을 창출한 것이다.


영경이 수환에게 끌어안겨 있는 그림(이건 장면이라기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성화에 등장하는 성모의 모성을 연상시킨다. 이 둘은 서로에게 피에타가 된다.)을 보라. 누가 누구를 끌어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둘이 하나가 되어 버린 형상을 하고 있다. 잘 빚어진 슬픔이다.

영경이 수환에게 안겨 뒤로 자빠지는 동작은 그대로 두면 뒷머리를 땅에 찧을 만큼 위험 천만해 보인다. 이런 영경의 몸을 붙들고 그녀의 몸이 바닥에 충돌하여 다치지 않도록 팔을 지면과 몸 사이로 집어넣으며 영경과 함께 쓰러지는 수환의 동작을 보라. 어떤 배우가 저렇게까지 연기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싶다. 영경이 걷는 걸음걸이는 화면 속에 등장하는 50대 알코올 중독자 그 자체이며, 스크린의 사각 프레임 안으로 튕겨져 튀어들어오는 수환은 류머티스 중증 환자의 모습 그 자체다.


김수영과 김민기

김수영은 고통받는 봄을 예찬한다. 이제 막 봄이란 놈은 술에서 깬 듯 겨울의 환통(幻痛)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봄과 같은 청춘의 생은 당황하지 말아야 하고 서둘지 말아야 한다. 영경이 주문처럼 외는 소리가 모두 그런 자기 최면이다. 술에서 깨기를 서두르지 말며 깨어나 눈뜬 현실이 진창투성이라도 당황하지 않겠다는 다짐의 서(誓)이다. 영경의 읊조림에 용기를 얻는 것은 오히려 수환이다. 그 힘으로 수환은 영경을 끌어안게 되는 것이니 결국 둘은 서로에게 한 몸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김민기의 '나비'는 아름다운 존재들이 살아내야 할 폭력적 현실을 서정적(청승맞은) 선율에 담은 노래다. 강미자가 보여준 소년의 또랑한 눈빛은 이 소설, 혹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상징적이다. 소설이 문자로 묘사되어 불확실한 상상을 자극한다면, 영화는 눈앞에 보이는 직관이고 직설이다. 말이 불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영화는 그 어떤 매체보다 강렬하다. 소년이 화면 가득 얼굴을 들이밀고 멈춰 있다. 큐사인이 나자 벌거벗은 소년은 뒤돌아 풀로 우거진 언덕을 거슬러 뛰어간다. 소년은 두 팔을 파닥거리며 뛰어간다. 결국 소년은 소실점 밖으로 사라진다. 한 마리 나비였던 것이 이 쪽에서 저 쪽의 세계로 날아 갔을 뿐이다. 그렇게 생은 내게 왔을 때의 그 모습으로, 또 다른 한 생 옆을 떠나가는 것이다. 비로소 영경은 수한과 함께 생이별한 자식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짧은 영화지만, 주의 깊게 봐야 할 장면이 많은 영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카메라 시점의 문제와 조명의 문제 등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을 거론할 수 있겠는데, 이는 한국 독립영화 모두에 공통되는 문제일 수 있어 딱히 '봄밤'에서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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